Vienna, Day 35

결국 다 똑같다, 받아들이는 것은 내 마음에 달린 것.

by 그냥 하자
unnamed.jpg 빈에서의 마지막 저녁, 벨베데레 궁전 정원의 노을


빈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둥이를 재우고 난 뒤 아내와 간단하게 맥주 한캔을 하며 서로를 축하하고 위로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성공적으로 여행을 마무리한 것을 축하하고, 그간의 고생을 위로하며, 못해본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이제 아내는 자고 있으며, 나는 휴대폰으로 베이비캠을 통해 둥이가 자는 것을 보면서 그간의 여행을 되돌아 보았다.


그 동안 여정에서 중요한 포인트(기억에 남는 것들)만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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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계획 했던 것들은 거진 다 달성한 것 같다. 일부는 조정되고 일부는 축소된 것들도 있지만, 크게 부족함 없이 빈을 느끼고 간다. 이젠 이 도시가 꽤나 편안해졌는데, 떠나야만 하는 것이 아쉽기도 하고 누차 말했던 대로 얼른 한국 가서 얼큰한 김치찌개를 먹고 싶기도 하다.


위 여정에서 많이 가본 곳들 위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초반에는 공연에 집중했고, 바로 직후에 가족들 모두가 감기에 걸려 아팠었다. 이후 미술관/박물관들을 꽤나 다녔고, 종반부에는 쇤부른 궁전 공원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다.


횟수로 보자면, 우선 쇤부른 궁전 정원을 총 4회 방문하였다. 첫 번째는 둥이와 아내와 산책만 했지만 나머지 3회는 정원 달리기를 하였다. 이번 빈 여행에서 가장 인상깊은 기억 중 하나다. 달리기 코스는 쾌적했고, 다양했고, 아름다웠으며, 날씨는 완벽했고 가을의 색은 환상적이었다. 아마도 평생 다녀본 달리기 코스 중 가장 완벽한 곳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으로는 미술사박물관과 벨베데레상궁이 4회를 차지하였다. 알베르티나하고 알베르티나모던은 각각 3회를 방문하였다. 아내와 둥이랑 같이 가기도 하고, 혼자 가서 오디오가이드도 듣고, 오디오 가이드 없이도 방문하였다.


각각의 미술관에서 간단하게 인상 깊었던 것들만 꼽아본다. 미술사박물관에선 아무래도 브뤼헐의 작품들이다. 농부의 춤이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그 이외에도 그의 모든 작품들이 의미가 있었고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또 지금 생각나는 것은 아르침볼도의 유명한 '두상' 작품들이다. 1500년대에 그와 같은 창의력이라니. 살바도르 달리가 그를 '무의식의 시각화를 최초로 시도한 르네상스 화가'라 칭했다고도 하는데, 다시봐도 500년 전의 작품이란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알베르티나에서는 모네의 아름다운 '수련'과 마리안 스토케스의 성스러운 작품들, 고흐의 '담배피는 해골' 같은 재미난 그림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케테 콜비츠의 작품들이었다. Day 18에 자세히 설명했지만 다시 봐도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알베르티나모던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작품 세계를 탐구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들도 일부 지하에 전시되어 있었지만 큰 감흥은 없었다.


벨베데레 상궁은 클림트의 '키스'가 가장 유명하지만, 모네의 '셰프', 에곤 쉴레의 '포옹', 올가의 '낙엽', 그리고 클림트의 '캄머성 공원의 산책' 등 좋은 작품들이 정말 많았다.


이외에도 현대미술관과 응용미술관, 자연사박물관과 기술박물관을 다녀왔는데,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자연사박물관의 어마어마한 콜렉션들, 특히 운석과 고생대 화석들이 좋았고 기술박물관에서는 그들의 자부심 가득한 선언문이 인상 깊었다. 현대미술관은 난해했지만 더 깊이 알고 싶게 만들었다. 다만 응용미술관만큼은 좀 감흥이 덜했다. 기대도 적었기에 아쉬움이 크지도 않았다.


식당과 카페는 여러 군데를 갔지만 기억에 남는 곳을 꼽는다면, 쇤부른 궁전 인근에 있던 인도커리 식당JR Indian Fusion Cuisine과 작은 로컬 식당인 Beisl in der Sigmundsgasse가 생각난다.


인도커리 식당은 쇤부른 궁전을 가기 전 마땅히 먹을 곳이 없어서 동네를 돌다가 우연찮게 들어간 곳이었다. 오전 11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고, 우리가 아마 첫 손님이었던 것 같다. 배가 고팠기에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도 힘들었고 왜 이렇게 늦나 하며 불만이 쌓이려고 할 때쯤 식사가 나왔었다. 그런데 커리를 한 숟가락 떠서 먹는 순간 정말 너무 맛있다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럴 때 내가 미식가가 아닌 것이, 그 맛의 섬세함을 표현할 방법이 '맛있다'라는 것뿐인 것이 너무도 안타깝게 느껴진다. 구글 평점이 4.8인걸 확인하고 들어가긴 했지만 정말 너무 맛있게 먹었고 이번 여행에서 먹었던 모든 음식을 통틀어 최고라고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 인상 깊었던 곳은 Beisl in der Sigmundsgasse으로 식당 이름이 길어보이는데 한마디로 '지그문트 거리의 선술집'이라는 뜻이다. 이 곳 역시 구글 평점은 높았는데 불친절하다는 리뷰가 있어서 살짝 걱정을 했었다. 우리는 슈니첼과 타펠슈피츠를 시켰는데 둘다 정말 맛있었다. 슈니첼은 다른 식당과 달리 살짝 두툼했는데도 질기지 않고 간도 아주 적다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우리를 감동시켰던 것은 슈니첼을 시켰을 때 나온 샐러드였다. 드레싱 소스가 정말 예술적으로 맛있었다. 나는 시큼한 맛을 좋아하지 않는데, 살짝 청량하면서 달콤한 맛도 섞여 있어서 샐러드뿐 아니라 슈니첼과 타펠슈피츠까지 찍어 먹을 정도로 맛있었다.


이렇게 한달이 좀 넘는 빈에서의 여정이 끝을 향해 다가간다. 어제 저녁에 나는 개인일정을 보내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아내와 같이 돌아갈 짐을 쌌고, 오늘까지 정리를 계속했다. 대강 정리를 다 마치고 벨베데레 상궁을 가서 클림트의 '키스'를 마지막으로 보고, 정원에서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 했다.


이만하면 그래도 충분히 즐긴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첫 날 도착해서 적은 글을 다시 읽어본다. 장시간 비행에 따른 피곤함과 낯선 공간에서의 긴장감이 섞여 살짝 각성 상태에서 적었던 것 같다. 그래도 계획했던 대로 거의 매일 여행일지를 작성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다. 여행지에서 매일 잠들기 전 글을 쓰는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정리를 하고 보니 이 순간의 '감상'들을 오래 가지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 아니, 지금 이 곳도 지극히 '현실'이긴 하다. 하루 두번씩 이유식을 먹이면서 아기를 돌보았으니 말이다.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일거리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의 현실'로 돌아간다. 이제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을 고민해야할 시간도 다가온다. 내년에는 이사도 또 해야할 것이다. 둥이가 커감에 따라 어린이집도 알아봐야 한다. 해야할 것들은 늘 쌓여있다. 절대 고갈되지 않는다.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끝나지 않는 회전목마처럼.


나는 쇼 프로그램, 특히 경연 프로그램을 잘 보진 않는다. 그런데 2021년 당시 쇼미더머니 10은 참 재미있게 보았었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그 가수가 뭐하는 사람인지 잘은 모르지만, 소코도모라는 가수가 있었고 '회전목마'라는 노래를 불렀었다. 리듬도 좋았지만, 그냥 노랫말이 너무 마음에 들었었다. '인생은 회전목마 우린 매일 달려가 언제쯤 끝나? 난 잘 몰라.....'


언제쯤 이 달리기가 멈출진 모르겠다. 그래도 쇤부른 궁전 정원에서의 황홀한 달리기도 좋고, 집 근처 바닷가의 달리기도 좋고, 산내음 물씬 풍기는 지리산 산길을 걷는 것도 좋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달리고 걸어갈 사람이 있어서 좋고, 가끔 쉬어가거나 잘못된 길로 가도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들이 있어서 좋다.


인생은 찰나 같이 흘러가지만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오로지 내게 남겨진 몫이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못한데, 그래도 글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완벽하게 진실됨이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이 순간에 충실하도록 노력한다. 얼른 자고, 내일 마무리 잘하고 한국으로 들어가야겠다.


"...
인생은 회전목마 우린 매일 달려가
언제쯤 끝나? 난 잘 몰라
...
가끔은 어렸을 때로 돌아가
불가능하단 건 나도 잘 알아
그 순간만 고칠 수 있다면
지금의 나는 더 나았을까?
...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빙빙 돌아올 우리의 시간처럼
인생은 회전목마
..."

— 소코도모, 자이언티, 원슈타인 회전목마 (Merry-Go-Round), 2021, Show Me The Money 10 Episode 2, 프로듀서 슬롬(Stone Music Entertai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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