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점심때가 돼서 어디서든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7번 국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는데 막 동해에 들어서고 있었다.
20년 쯤 전이라, 검색만 하면 맛 집이 줄줄이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강릉이나 속초쯤이었으면 모를까
주변에 보이는 것은 시멘트 공장뿐이었다.
K가, 그래도 바닷가니까 횟집은 있지 않겠느냐며
무작정 바다 주변으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저기 보이는 게 촛대바위라며 잠시 차를 세웠는데
비수기에다 평일이라서인지 주변은 매우 한산했고 문이 열린 식당도 별로 없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했는데
어쩐지 갈수록 휑한 느낌이다.
이런데 문 연집이 있겠나 싶고 연 집이 있다고 한들
음식이 맛있을 리 없지 않을까 싶어 막 돌아 나오려던 차에
언덕 위로 허름한 집에 문이 열린 것이 보였다.
배고픈 거 못 참는 K때문이기도 하고
식당은 오래 됐지만 그 집에서 보이는 전망이 궁금해서
홀린 듯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했던 것처럼 식당 안에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회덮밥을 주문했다.
주방장이 요리를 못해도 결국 초장이 다 할 테니
크게 모험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가장 무난한 메뉴라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창밖으로 보이는 전망은 예술이었다.
촛대바위가 정면으로 보였고
날이 흐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흐렸기 때문에 더욱
검푸른 바다 위로 뾰족하게 솟은 바위와 구름과
회색의 이른 봄 날씨가 환상의 조화를 이뤘다.
음식이 나왔다.
냉면 볼이 이미 수북해서 밥이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상을 다 차린 후 뚜껑도 없는 공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가져온다.
지금 밥을 하느라 늦었다면서.
밥이 맛있으면 그 집 음식 다 맛있다는 지론을 가진 K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볼에 수북했던 것은 채소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비비느라 뒤적거릴수록 밥보다 채소보다 회가 엄청 많이 들어있었던 거다.
평소 회라면 어항 속 물고기를 보면서도 군침을 흘리는 K의 얼굴이 만족의 미소로 가득했고
나는 밥을 넣지 않고 회만 먹고도 배가 불러 남길 정도였다.
무슨 회냐고 물으니 사장님이 아침에 잡아온 잡어라고 했다.
이후로도 나는 회덮밥을 먹을 때면 촛대바위가 떠올랐다.
“회덮밥이 맛없기도 쉽지 않은데.”
예정대로 였다면 오늘이 제주에서 돌아오는 날이다.
제주도 대신 동해바다에라도 가보고 싶었다.
급하게 속초에 숙소를 정했고
가는 길에 점심때가 되어 식당을 찾았다.
동해에서처럼 기분 좋은 우연을 만나면 좋겠다는 기대로
포구 근처에 있는 허름한 횟집이 모여 있는 곳을 기웃거렸으나
하필 그 날이 휴무라고 했다.
체크인시간도 채워야 해서
이리저리 방황하듯 식당을 찾다가
적당히 오래 된 것 같으면서도 적당히 전문점 냄새가 나는 횟집식당으로 결정했다.
회덮밥 등 메뉴는 여기저기 붙어있었지만
어디에도 가격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래봐야 회덮밥인데 뭐.’
음식이 나왔다.
밥을 담은 그릇 주변에 말라붙은 밥알이 보였다.
‘그래도 뭐, 회덮밥이잖아.’
배가 고프기도 했고
회덮밥 먹어본지 백 만년은 된 것 같은 기분에
처음부터 밥 반 공기를 넣고 초장 듬뿍 넣고 비볐다.
비볐는데, 비비고 있는데
“회...회는??”
요즘 비문증이 심해져 자꾸 눈앞에 뭐가 가리는 것 같아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양배추 등 채소와 밥 사이로 매우 인색하게 회 몇 점이 보일까 말까한다.
‘어차피 초장 맛이니까.’
라며 자꾸 초장을 짜 넣으니 보다 못한 K
“아니 웬일로 자꾸 초장을 넣어? 짠 거 싫어하면서?”
“그러게, 이게 회덮밥이 맛없기도 쉽지 않은데...”
“회덮밥은 촛대바위에서 먹었던 게 최고였지.”
“당신도 그 생각했어? 나도 촛대바위 생각했는데.”
가격도 모른 채 계산을 하고나니 카드 알림에 4만원이 뜬다.
뭐가 잘 못된 거 아니냐고 물으니 K가 말했다.
“요즘 그 정도 할걸?”
아, 내가 너무 오래 쉬었나보다.
동해바다도 회덮밥도 촛대바위도 모두 오래 전 그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오래된 포구의 허름한 횟집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가는 곳마다 해변은 크든 작든 서핑성지로 바뀌어있었고
해변의 성격이 그렇게 바뀌는 것에 따라 주변에도
깔끔한 카페와 이탈리안 식당, 숙소 등이 새로 생겼거나 공사 중이었다.
촛대바위에 갔던 것이 언제쯤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부산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는지
서울에서 내려가는 길이었는지
계절이 이른 봄이라고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은 겨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일기라도 쓸 걸 그랬다.
사진이라도 찍어 둘걸.
그래도 다행인건
K와 나의 기억 퍼즐이 동시에 맞았다는 점이다.
일기를 썼던들 사진을 찍었던들 그랬던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아마도 이제부터 우리는
그렇게 같은 기억 퍼즐을 맞춰가면서 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