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때로 그립고 문득 서러운 이름
어머니는 아버님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고 싫어하셨다.
아버님은 어머니가 잔소리 하는 게 싫어서 또 술을 마셨다.
손주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는 왜 만날 싸우시냐고 물었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또 아버님한테 잔소리를 했다.
그게 가만히 들어보면 싸우는 게 아니고 그냥 두 분이 얘기하는 소리라는 것은
결혼한 지 이십 년이 지나서야 조금 알게 되었다.
아버님의 고향은 평안남도라고 했다.
팔 남매 중 사 남매가 먼저 피난을 나왔는데
남은 형제들과는 중앙청 대문에 표시를 해 놓을 테니 그걸 보고 찾기로 약속을 했다고 했다.
그마저 어쩌다 같이 내려오던 형제들과도 헤어져 혼자가 된 아버지는
개명을 했고 인천 어디쯤 미군부대에서 일을 하다가 어머니를 만났다고 했다.
얼핏 봐도 도도하고 격이 달라 보이는 어머니에게
아버님이 어떻게 구애를 했는지는 아직도 궁금하기는 하다.
신혼 무렵, 아버님은 동네에서 맥가이버로 불렸었다.
그 때는 손재주만 많으신가보다 했었다.
어느 해엔가 명절에 노래방에 갔을 때
아버님은 ‘고향의 강’을 매우 박력있게 불러 노래도 잘하시는구나 했었다.
일을 정리하고 시골에 집을 짓고 내려가셨을 때
고향 얘기를 해달라고 했더니
매우 적극적으로 오래 전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이 전 30년 가까이 살면서 알았던 것보다
그 날 훨씬 더 많은 가족사를 들었다.
아버님은 전쟁 통에 몸으로 부딪혀 살아남은 증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일어 노어 영어 중국어를 다 조금씩 기억하고 있었다.
시를 쓴 적도 있었고 그림을 그린 적도 있으며
가죽으로는 지갑이나 가방을
쓰고 남은 나무로는 의자와 테이블을 뚝딱 만들어 내기도 했다.
시골로 이사를 한 후
집에는 갈 때마다 뭐가 하나씩 생겨났다.
마당에 콘크리트를 발라 수돗가가 생겼고
집 뒤로 커다란 창고가 생겼으며
정자가, 비닐하우스가 만들어져 어머니는 거기에 고추도 말리고 나물도 널어놓았다.
몇 해 전, 약속이 있다고 집을 나간 아버님이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한 나절이 지난 후에 옆 동네 지구대에 넋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던 아버님은
초기 치매 진단을 받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후로 아버님은 일체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코로나 상황이 시작되고 자주 가지 못하다가 한 번 씩 가면
아버님은 원래도 많지 않던 말 수가 부쩍 줄어든 느낌이다.
식사 때마다 마치 어머니에게 오기라도 부리듯 소주 가져오라던 말도 이제는 하지 않는다.
단추를 보면서
“이제 얘도 많이 늙었지?”
라면서 간식으로 드시는 건빵을 한 개 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얘도 이제 나이가 많지?”
라며 또 건빵을 꺼낸다.
개미지옥처럼 반복되는 건빵 간식에 단추 배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을 때
안 되겠다 싶어 산책을 시킨다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아버님은 창가에 서서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관심을 돌리기 위해 아버님과 마주 앉았다.
생각해보니 큰 아이를 낳기 전까지 시부모님이 나를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머님은 급할 때 “야!” 라고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지만
이름을 불렀다거나 드라마에서는 흔하디흔한 “아가야~” 라고 부른 적도 없었다.
“아버님, 제 이름이 뭔지 아세요?"
불쑥, 제가 누군지 아냐는 것도 아니고 이름이 뭔지 아시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연숙이, 연숙이잖아.”
놀랍게도 아버님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설마 내가 네 이름도 잊어버렸겠냐는 것처럼
오래 전 자신감 넘치던 아버님의 표정을 잠깐 본 것도 같다.
가슴 한 가운데에 뜨거운 것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여섯 살에 세상을 떠난 내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불렀던 기억이 없다.
사실상 수도 없이 불렀을 테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테고
시아버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부른 적이 없었던 며느리 이름을 부른 셈이다.
그 느낌이 좋아서 한참동안 말없이 아버님 앞에 그냥 앉아있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봄 햇살이 뾰족하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