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신문 보는 여자

오늘은

by 이연숙



K는 내가 첫사랑이라고 했다.

사실, 정확하게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던 것 같고

나를 만나기 이전에 진지한 연애를 해 본적이 없다고 한 걸

내가 그렇게 알아들은 것 같기도 하다.

보통은 결혼을 한 이상 그냥 우겨야 한다는 말은 자주 들었다.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두 진행자중 A가 B에게


“다시 태어나면...”

“아내하고 결혼해야죠.”


“절친과 아내가 물에 빠..”

“아내!”


“첫사랑은..”

“아내죠!”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다부진 입매로 능청스럽게 ‘아내!’를 외치는 장면은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

알아도 그러려니 넘어가 줄 수밖에 없는, 뻔한 거짓말 중 하나다.

K가 초등학교 때 공부를 하려고 책을 펼쳤는데

주일학교 여학생의 얼굴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보이더란다.

그게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을 K가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일단 우기고 보는 건지

그게 첫사랑 아니었냐고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




살면서 한 번도 해 본적 없는 소개팅을 주선하게 되었다.

혼자 된 내 친구와 처지가 비슷한 K의 친구를 이어 주려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나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넌지시 놀려 먹는 말

투머치 띵커, 사념지존의 대마왕에 걸맞게

만약에... 어쩌지? 혹시... 어떡하지? 병이 도졌다.


“만약에 서로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지?”

“만약에, 마~~~~안약에 잘 안 돼서 나를 원망하면 어쩌지?”


듣다듣다 K가 입을 열었다.


“나 학교 다닐 때는 버스에서 신문 보는 여자가 멋져 보였어. 지적이고...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게 다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이러쿵 저러쿵

그러니까 만나보고 좋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십대도 아닌데.”


뒤에 하는 얘기는 아련한 소음으로 들리고

‘버스에서 신문 보는 여자가 멋져 보이더라.’ 라는 말만 귀에 쏙 꽂혔다.

처음 들어보는 K의 구체적인 이상형이었다.

만약 K가 학교 때 그 이상형을 고수했다면

하마터면 K와 결혼하지 못할 뻔했다.


20220514버스에서 신문 보는 여자.jpg


전에 살던 집은 지하철 종착역 근처였다.

서울과 접근성이 떨어져서 그렇지

여러 지역으로 가는 광역버스 노선도 많고

지하철이 있으니 교통은 편리했다.

서울에서 약속이 있으면 나는 주로 지하철을 이용했다.

책 한 권 들고 타면 춘천이든 천안이든 혹은 용문이라도 지루하지 않게 갈 수 있다.

반면에 등받이도 높고 좌석도 넓은 광역버스는 주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올 때 편하게 오고 싶으면 탔다.

나는 버스에서는 멀미가 나서 책을 읽지 못한다.

휴대폰 글자도 보기 어려워 음악을 듣거나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그렇다보니 내가 버스에서 신문을 보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있을 리 없다.

즉, 혹여 우연히 라도 내가 K의 눈에 멋지게 보일 일은 없었을 거라는 결론이 된다.


생각해보니 그 여학생이 좀 궁금하긴 하다.

그 시절 아침 등교 시간 버스 안 풍경은 보통, 밀고 밀리는 만원버스 상황이었을 터다.

자리에 앉아있다고 온전한 자세를 취하기조차 어려웠을 텐데

대체 신문을 어떻게 읽을 수 있었을까?

친구 소개팅 얘기하다가

불현 듯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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