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영어 수업 중에 강사가 각각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표현해보라고 했다.
몇 사람에게는 그렇게 묻다가
내게는, 내가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지키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지 물었다.
그러더니 공통 질문이라며
만약에 3백만 원이 생긴다면 집을 꾸미기 위해 뭘 들여놓고 싶으냐고 또 물었다.
어제 출석했던 다섯 명 중
나이가 제일 많은 A는 성능 좋은 스피커를 살 거라고 했고
동갑 친구인 B는 안마의자를
수업 때마다 제일 진지한 C는 명품 백을 산다고 하며 주제에서 벗어났고
요가 강사라는 D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이 각자의 얘기를 하는 동안 나는 3백만 원이라는 금액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만원도 일억도 아닌, 왜 하필 3백만 원일까?
만원이 생겼을 때 뭘 하겠냐고 물었더라면
그리 크게 비현실적이지 않으니 대답이 금방 나올 것 같고
일억이었다면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상상의 나래를 펼쳐 엉뚱한 대답을 해도 그만이다.
그런데 3백이라니...
명품백은 얼마 하는지 모르지만 안마의자는 3백 가지고는 애매하다.
어차피 생기지도 않을 돈이라기에는 그리 어마무시한 금액이 아니고
공돈으로 생기기에 3백 이라는 금액은 현실감이 없다.
동생과 지인이 한다는 숲속에 있는 북카페에 다녀 온 후
동생에게 말했다.
“북카페 하겠다는 꿈은 이제 그만 접어야겠어.
혹여 출생의 비밀에 숨겨진 재벌 할아버지가
내게 거대한 유산을 상속하고 돌아가셨다면 모를까.ㅋㅋ“
어디선가 들었던 농담을 써 놓고 보니
어쩐지 살짝 설레는 느낌이 들었다.
친할아버지는 그 시절 목수였는데
술을 좋아하셨고 엄청 검소하셨으며
손재주가 많은 분이었다고 들었다.
2년 터울 동생이 내어난 후
나의 양식이었던 젖을 강제로 떼려는 엄마를 보면서
“에휴, 죽어라. 에미라고 젖도 안 주는데 살아 뭐하냐.”
라며 혀를 끌끌 차더라는, 할아버지가 손녀딸에게 했다는 유일한 전언 뿐
내 기억 속에 없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재벌로 둔갑을 하거나
더구나 거액을 남겨 놓을 일은 없을 텐데도 말이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게스트에게 물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아내와 결혼 하겠냐고.
골똘히 생각에 빠져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에게
다른 진행자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어차피 일어나지도 않을 일인데 뭐 그렇게 고민을 해요?”
다른 출연진과 방청객 모두 한 바탕 웃고 지나간 후에도
그 게스트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도
상상을 하는 동안은 잠시 행복해질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든 아니든
지금 아내와 다시 결혼하겠다고 하면 사는 동안 반찬이 달라질 수도 있고
있지도 않은 출생의 비밀 속에서나마
재벌 할아버지 손녀도 돼서 잠시 망상을 하면 또 어떤가.
그래도 혹시 우리 할아버지가
생으로 젖 뗀 손녀딸이 불쌍해서
몰래 꿍쳐둔 돈이 어딘가에 묻혀있다면
그런데 아무도 거기가 어딘지 모른다면
그것도 세상 억울한 일이기는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