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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숙 Sep 20. 2023

나이가 드니 끊을 것이 많아진다.

음식을 잘 못 먹은 것도 없는데 이즘 들어 장에 탈이 자주 났다.

이제는 그것도 이력이 나서 증상이 느껴지거나 생길 것 같을 때면 죽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것으로 예방을 하는 수준이 이르렀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요령정도로는 잘 듣지 않았다.

하여 한 달 쯤 전에는 결국 집 근처 내과에 갔었다.

역시나 장염이 의심된다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뻔한 질문인줄 알면서도 의사에게 물었다.


“배가 아파서 어제부터 커피를 안 마셨더니 머리가 너무 아파 정신이 없네요. 이럴 때는 그냥  커피를 마셔도 될까요? 아니면 두통약을 먹을까요?”


쯧쯧쯧...

소리를 내지는 않았어도 의사의 황당한 표정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뜻밖에도 의사는 체념하듯 내 맘에 드는 말을 했다.


“그렇게까지는 하지 마시고 정 아프면 그냥 커피를 한 잔 정도 드세요.”


처방해준 지사제가 아직 한 보따리나 남았는데 다행히 설사도 멈췄고 복통도 사라졌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이 그렇듯 소중할 수가 없었다.

요즘 들어 부쩍 만사가 귀찮은 와중에도 아침마다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아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는 일만은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 한다.

포트에 물 올리고 원두 갈고 필터 접어 끼우고 컵과 드리퍼 워밍하고 등등...


그런데 얼마 전 축구 중계가 있던 날이었다.

예외 없이 K는 치킨을 사왔고 평소에는 탄산수를 마셨는데 그 날은 무슨 마음이었는지 맥주를 마셨다.

그게 탈이 됐다.

2~3일간 버텨보다가 여행 당일에는 안 되겠다 싶어 결국 병원에 갔다.

전에 갔던 곳이 아닌 원래 다니던 내과였다.

이미 답을 들어 알고 있지만 같은 답을 줄 거라 기대하며 질문을 했다.


“커피를 안 마셨더니 머리가 너무 아픈 데 한 잔 정도는 괜찮겠죠?”


그리 불친절한 건 아니지만 진료를 받고 나오면 어쩐지 기분이 상하는,

설명하는 말이 딱히 틀린 건 아닌데 그 말이 콕콕 찌르는 이상한 능력을 가진 의사였다.

이 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커피를 마셔서 머리가 안 아프다는 건 뇌를 속이고 있는 거예요. 커피를 끊지 않으면 편두통이 점점 심해지는 악순환이 되는 거예요. 머리가 아프면 차라리 두통약을 드세요.”


라며 장염약에 두통약, 거기에 그래도 낫지 않으면 먹으라고 편두통약까지 처방해주었다.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라 실망은 됐지만 듣고 보니 꽤나 그럴듯한 말이었다.

그 참 이상하게 틀린 말은 아닌데 어쩐지 그런것도 모르냐며 된통 혼나고 나오는 느낌에 역시나 기분은 찜찜했다.

커피가 빠지고 나니 여행기간 내내 뭔가 커다란 한 가지 절차가 생략된 기분이다.

홀가분한 것 같기도 하고 허전한 것 같기도 하다.

같은 이유 때문에 맥주를 끊었고 이번에는 커피를 끊어야 한다.

밀가루를 끊었고 튀김을 끊었고 성인병에 환경까지 영향을 준다고 하니 소고기도 끊어가는 중이다.

달걀도 끊고 식용유도 끊고

해산물도 끊어야하나 하는데

다음엔 또 뭘 끊어야 할까.



나이가 드니 끊어야 할 게 점점 많아진다.

먹을거리는 끊기더라도 인연은 끊기지 않으면 좋겠다.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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