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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숙 Dec 14. 2023

한 번쯤 듣고 싶었던 말


“김서방 퇴직했나?”


순간 번개를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

엄마가 말하는 김서방은 K이고 그는 퇴직한지 이미 육 년이 되어가고 있다.


“그...그치 퇴직했지.”


침착함을 유지해야한다는 마음과 설마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다들 퇴직을 했어. 그래서 지금은 둘만 살겠네? 그래 요즘은 둘만 사는 집이 많아.”


그 날 엄마는 그 말을 토씨하나 바꾸지 않고 다섯 번 쯤 더 했다.


엄마와 함께 사는 오빠 부부가 지방에 볼 일이 있어 집을 비운다며 

사흘 간 엄마를 돌봐 달라고 했다.

코로나 직전 고관절을 다치기 전 까지만 해도 혼자서 수원 일산을 세 시간 걸려 오가고

한 달에 한 번 펌과 염색을 하러 연신내 단골 미용실까지 다니기도 했었다.

엄마의 옷은 내 옷보다 많고 화려했으며 화장품을 소진하는 속도 또한 나보다 세 배는 빨랐다. 자기 외모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나는 엄마와 아예 게임이 안되는 수준이었다.

그랬던 엄마가 다리를 다친 이후부터 지하철을 혼자 타러가지 못했고

처음 몇 번인가는 아들이, 사위가 미용실에 모셔다 드리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미용실에 가기를 포기했다.

꽃분홍색 립스틱이 매우 잘 어울리던 엄마가 화장하기를 멈추자 더 이상 엄마를 위해 화장품을 살 일이 없어졌다.

지난 여름 두 번째 골절을 겪었을 때는 집을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고령에 이사로 인한 혼돈 때문인지 수술과 입원을 치르느라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이 원인인지

엄마는 요즘 부쩍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럴 때마다 자식들은 나도 그렇다며 심지어 나는 더 한다며 한술 더 뜨기도 했다. 

그런데 건망증 보다, 시점을 혼돈하는 것은 어쩐지 싸한 느낌이 들었다.


“K2가 신랑 직장 따라 멀리 가서 산다고 했지?”

“지난 봄에 서울로 이사왔어 ㅇㅇ동.”


이 말은 이틀동안 일곱 번쯤 물었다.


“이 집으로 이사오기 전에 누구랑 어디 살았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그러면서도 아버지와 어떻게 결혼하게 됐냐는 말에는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바로 어제일인 것처럼 술술 얘기했다.


“윗집에 늬 고모가 살았잖아. 나만 보면 만날 우리 동생댁 삼는다고 그랬는데

하루는 늬 아부지가 누나집에 놀러왔는데 그 집 큰 딸이 나보고 와서 같이 화투를 치자고 하잖니. 진 사람 손목을 때리기로 했는데 내가 지니까 내 손목을 잡으면서 늬 아부지가 쑥스러워서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더라.”

“누가 먼저 좋아했어?”

“이따금 기차역에서 저 멀리 보일 때가 있었는데 사람이 듬직하고 좋아보이더라.”

“아버지가 엄마 예쁘다고 말을 한 적도 있었어?”

“있지, 한 번은 창경원 구경을 가자고 해서 서울역에서 만났는데 내가 한복 입은 모습을 보고

‘야~ 이쁘다, 이쁘네.’ 그러더라고.”


더러는 전에도 몇 번인가 들어본 적 있는 얘기이고 어떤 부분은 처음 듣는 얘기도 있었다.

그렇게 보면 엄마의 기억 능력은 아직 건재한 느낌이었다.

언젠가 기억이 깜박깜박 한다는 말에 일기를 써보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싫다며 눈도 잘 안 보이는데 무슨 일기를 쓰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는데

놀랍게도 스프링 노트에 연필로 꼭꼭 눌러 쓴 일기장을 보여주었다.

일기는 어느 날은 두 줄, 어느 날은 다섯 줄 이상을 쓰기도 했는데 거의 빼먹은 날은 없었다.

필체가 좋다고, 기억력도 좋다고 칭찬을 하다보니 어쩐지 내가 엄마를 우쭈쭈하는 분위기다.

엄마가 내 말에 고분고분한 것 같은 느낌이 처음이라 어색했다.

마음 저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사심이 올라왔다.


“엄마, 오늘은 연숙이랑 영화도 보고 점심도 먹었는데 그게 아주 맛있더라고 쓸 거지?”

“으응 그래, 고기에 쌈 싸 먹은 거 맛있게 먹었어. 된장이 짜지도 않고 맛있더라.”


용기를 내서 내친김에 또 물었다.


“엄마, 연숙이가 어릴 때부터 살림하느라 애썼지?”

“그렇지, 내가 나가 다니느라 니가 고생했지.”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 걸


“그래서 고맙고 안쓰럽고 그래?”

“아 뭐, 고생이야 다 했지. 오빠도 고생했고 막내도 딱하고.”


말을 하고 보니 기운 떨어진 노인에게 어거지로 자백을 강요한 얍삽한 형사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다만, 살면서 엄마에게서 한 번쯤 

‘네가 제일 힘들었겠다. 애썼다.’

라는 말을 듣고 싶었을 뿐인데.

그 말을 들으면 응어리가 풀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돌처럼 더 딱딱해지는 느낌이다.

딱딱해진 돌덩이는 떼서 던져버리고 지금은 아직 곁에 있는 엄마를 조금 더 붙잡아야할 시간 인 것 같다.


“이러다 늬들도 못알아 보게 되면 어쩌냐.”

“.......”


엄마의 시간은 엄마의 속도로 계속해서 가고 있고

나는 신발 벗어들고 뛰어도 엄마의 속도에 닿을 수 없다.


“엄마가 못 알아보면 우리가 알아보면 되지.”


그래도

너무 빨리 놓아버리지는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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