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월에 일본어공부를 시작했다.
왜 일본어였나하면 그 때 시점으로부터 일 년 후 일본여행계획이 있었기 때문이고
왜 그 때였냐고 하면 마음이 우울해서 집 밖으로 나갈 일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강좌의 이름은 ‘일본어 회화 기초’반이었는데 회화라기 보다는 한자공부였다.
4개월인 한 학기가 세 번 도는 동안 일년이 지났고 올 해 두 번째 학기에 재등록을 했다.
새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강사가 하는 말을 이제는 거의 외울지경이 되었는데
일본과 한국의 간략한 역사얘기와 한자에 얽힌 일본어와 한국어 어원에 관한 얘기
그러다 결론은 언제나 지금 이 수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수업에 참여한 여러분은 행운을 잡은 거라는 말로 마쳤다.
사실상 일본나라에 크게 관심이 없었으니 그 수업이 회화든 한자든 나는 상관이 없었다.
기초반을 마치고 선택지가 중급반 밖에 없어 잔뜩 주눅이 든 채로 선배님(?)들 사이에서 버벅거리며 수업을 버티면서
‘내가 미쳤지, 만다꼬 이 고생을 돈주고 하고 있나.’
속으로 수도없이 구시렁거렸다.
자칭 T라서 눈치가 좀 없는 것 같다는 강사는 여기저기서 들은 좋은 얘기들을 강의 중간중간에 끼워넣고는 한다.
대부분은 부담없이 듣고 넘길 내용들인데 가끔은 고개가 끄덕여지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때는 진도를 맞추기에 시간이 빠듯하다면서도 얘기가 옆길로 오래 새는 경우도 있다.
어느 날 아침 강사의 표정이 평소와는 조금 달라보였다.
현재 맡고 있는 수업이 여섯 개쯤 되는데 그 중에 노인반이 있다고 했다.
지난 주에 한 어르신이 선생님의 수업 방식에 대해 불만을 얘기하더란다.
이 수업을 한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간다는 강사에게 그런 상황은 그리 낯설지 않다고 했다.
모두에게 맞춰드리면 좋기는 하지만 그러기는 어렵고 그러니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평소처럼 조분조분 설명을 했다고
그런데 노인은 납득할 생각이 없었으며 오히려 역정을 내셨다고 했다.
급기야 어제 수업에 그 분이 오지 않았다며 나를 싫어하는 모양이라고 말하고는 짐짓 뾰루퉁한 표정을 익살스럽게 지어보이려고 했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그 얼굴에서 상처를 받은 것 같은 표정이 읽혔다.
강의경력이 이십 년이든 삼십 년이든 자기를 공격하는 대상에게 상처받지 않는다는 건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러면서 강사가 말했다.
“괜찮아요. 싫어하면 싫어하라죠. 누가 그러더라구요.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집중하면 된다고, 싫어하는 사람까지 신경쓰기에 인생이 너무 짧지 않아요?”
라며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감동하며 깔깔 웃었다.
듣고보니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엄마는 왜 나를 싫어할까, 한 때 베프였던 친구들이 말도 없이 연락을 끊은 건 내가 싫어져서였겠지? 라며 스스로를 달달 볶던 터라 갑자기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당연하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인정할 수 없었나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해주고 다정한 말을 건네는 대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억울해하는데 마음을 다 써버렸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마음에 그득해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강사의 얘기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어 있었다.
“내가 얼굴이 좀 안 돼서 그렇지 강의는 잘한다고 했더니 남편이 뭐랬는 줄 아세요?”
대답하기 어렵기도 했지만 그럴 새도 없이 그가 이어 말했다.
“왜! 얼굴이 어때서?”
라고 말하고는 민망한 듯 손뼉까지 치며 웃었다.
참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다.
일 년이나 공부를 하고도 일본어는 한마디도 못하지만 강사는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쩍 책상 아래로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그러니까 어디 보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그....저....에....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