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은니 엄청 는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
“으응? 그, 그게 무슨...”
A는 일본어반 짝꿍이다. 삼 년전 일 월 지역 평생교육원 일본어 회화 기초반에는 최저 기준 수강생숫자로만 쳐도 최소 열다섯 명 정도가 있었다. 사 개월 후 수료할 때에 남은 인원은 나 포함 네 명이었고 두 남성 멤버는 나중에 다시 수강할 것을 약속하며 하차했고 그리하여 A와 나 둘이 중급반으로 승급(?)을 했었다.
사실, 말이 좋아 중급이지 초급을 마쳤으니 옮겨갈 뿐 실력은 전혀 그렇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 것도 개인에따라 차이가 매우 컸는데 일본관련 업무를 하느라 일어를 배워야해서, 로 시작해서 일본에 가족이 산다든가, 전공을 했지만 오래 돼서 다시 공부하려고,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였다든가 하다못해 일본이 너무 좋아서 등등 일본어 공부를 해야하거나 하고싶은 이유는 생각보다 뚜렷하고 다양했다.
맨땅에 헤딩하듯 완전한 일본어 무지자는 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무지자가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하고 경험자는 느긋할 것 같은 그림이 그려지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회화반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일본한자에 더 무게가 실려있고 한자로 단어를 습득했다는 가정하에 잡지로 된 원서를 읽는 과정이 매 수업마다 반복이 된다.
A는 매 과마다 한자를 찾고 응용문장을 해석해서 원어민 음성을 녹음 (그것도 한 번은 너무 아쉬워서 세 번씩)을 해서 듣고 내게도 파일을 보내주는 것을 매 수업마다 했다.
수업 마치고 오면 저녁 준비할 때까지 꼬박, 그리고 다음날 아침 먹고부터 종일 한자책을 붙잡고 씨름하는 나로서는 A는 잠은 언제 잘까? 라는 궁금증이 생기기까지 했다.
진즉에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하버드 갔겠다, 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구시렁거리면서도 포기를 할 수 없었던 것 역시 A덕분이었다.
사람좋고 붙임성 좋은 A가 나를 붙잡아 무슨 득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번번이 귀여운 협박(?)과 진심어린 조언으로 말려줘 그것이 벌써 삼년 반이나 됐다.
그 쯤 되면 초급은 면한 것은 당연할 테고 일드의 대사가 쏙쏙 귀에 들어오고 단어의 발음을 보지 않고도 저널 쯤 읽어 내려갈 수 있어야겠지만 어쩐일인지 나는 여전히 러닝머신위를 걷는것처럼 제자리다.
그 사이 A는 갑자기 가족 간병을 해야하는 상황이 돼서 두 학기, 8개월을 쉬게 되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가 없는 수업에 나가는 동안에도 나는 발 한 짝만 들여놓은 채 ‘뺄까? 말까?’를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었다.
A가 수업에 오지 못한 후 한 학기쯤 지났을 때 다른 멤버와 함께 만났을 때, 저만치서 걸어오는 예전 수업동료들을 보고 A는 울컥해서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간병이 힘들어서이기도 했지만 준비없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자신의 일상이 사무치더라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약간의 가책이 되기는 했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리고 오 월 새학기에 A가 돌아왔다.
전에도 열정이 있었지만 다시 만난 그녀는 예전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비장했다.
“언니, 할 수 있을 때 될수록 다 하려고요. 언제 무슨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그 말이 마음에 굵은 울림으로 자리잡았다. 이전에 그를 만났을 때 느꼈던 가책의 정체가 그것이었던 것 같다.
불현 듯 마음이 급해져 A가 하려고 한다는 것을 죄다 따라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본어는 야간 수업에 한번 더 청강을 하고 전부터 관심있던 강좌를 나도 신청하겠다고 했다.
강사가 바뀐 이후로 매번 수업을 하고 나면 개운하기보다 기진맥진해지는 요가 수업을 그만두고 수영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는데
옆 건물 다른 강좌는 수업료가 비싸서 패스, 수영은 수영장이 너무 멀어서 여전히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청강수업에는 가려고 하는데 밤 열시에 끝나는 수업을 아홉시만 되면 졸음과 사투를 벌이는 내가 과연 계속할 수 있을 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주말에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자전거를 타고 수영장에도 가봤는데, 거길 갔다가 수영을 하고 과연 내가 수업에 와서 졸지 않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더라구.
일어도 도무지 늘지도 않고 난 아무래도 이번생에는 틀린 것 같아. 에휴.”
가만히 엄살쟁이 언니의 푸념을 듣던 A가 말했다.
“언니, 언니 안 본 사이 읽기가 엄청 늘었더라. 내 은니 엄청 는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
8개월이 그냥 지난게 아이다, 내는 우짜노.”
“어엉? 내가?”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지만 두 학기를 쉬었던 A가 보기에 나는 뭔가 달라져 보였던 모양이다.
어제도 일기에 그렇게 썼다.
오늘도 브런치 글도 못쓰고 책도 못 읽었고 영화도 못 봤네. 그림도 그리고 싶었는데 난 대체 뭘 하면서 하루를 보낸 거야?
다 할 수는 없을테니 하루에 하나씩만 해야지.
오늘은 브런치 글을 썼으니 내일은 영어공부, 일본어 숙제
그리고 모레는 영화를 보고, 글피는, 그글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