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만나는 일이 거의 없는 일상에 갑자기 연속으로 삼 일간 약속이 생겼었다.
모두 반갑고 보고싶던 사람들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약속이 있어 하루 외출했다 돌아오면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충전의 시간을 가져야하는 극 내향인이다보니 설렘과 함께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금요일에는 오래 전 약 육개월간 근무했던 직장의 동료 둘을 만났다.
결혼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둔지 이십여 년 만에 취직을 해 그들과 함께 근무를 했고 그 곳을 그만 둔 이후로 다시 직장에 다녀본 적은 없다.
동료라고 했지만 나이는 나보다 십 년 아래인 둘은 동갑내기 친구였다.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고 사람들 대하는 일이 어려웠지만 표면상의 이유는 큰아이가 고 삼이 돼서 내가 그 곳을 그만 둔 이후에도, 그들은 꾸준하게 일을 계속했고 몇 번인가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도 했다는 기간이 무려 이십 년이 다 되어간다.
무던하고 유한 성격 덕분이라 그런가보다고 했지만 그들이라고 갈등없이 마냥 편하기만 했을리 없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어린 나이에 크게 아팠었다는 A는 여리여리하고 조용하며 생긋 웃는 미소가 예쁜 친구였다.
내가 그 곳에 추천해줬다는 이유로 두고두고 자기를 취직시켜준 ‘은인’이라고 말하는 B는 씩씩하고 성격이 좋아서 늘 주변에 친구가 많았다.
그들을 자주 보지는 못했어도 연말이면, 해 바뀌기 전에 봐야하지 않겠냐며 늘 나를 챙겨 불러주고는 했다.
그 것이 지난 이삼 년 뜸해져서 이제 그들과의 인연도 여기까지인가보다 했었다.
A가 얼마전에 사표를 냈다고 했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좋은 조건의 직장으로 이직을 하려니 했는데 이번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요약하자면 오너 아래 관리자가 있는데 사람을 귀하게 여길줄 모른다고 했다. 높은 급여와 정확한 근무시간이라는 모든 직장인들이 바라는 조건은 좋은데, 딱 거기까지라고. 직장내 괴롭힘 수준이 도를 넘었으므로 직원이 입사하면 보통은 삼 개월에서 짧으면 입사하자마자 바로, 길어도 육 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둔다고 했다. A는 그 곳에서 일년 육개월을 버텼는데 그 정도면 장기근속이라며 주변 사람들이 놀란다고했다.
그렇게 사람이 자주 바뀌면 업무가 제대로 진행이 되느냐고 물었더니 관리자는 또 뽑으면 된다며,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하더란다.
퇴직처리 과정이 뭔가 순조롭지 않은 듯, 얘기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 문자를 주고받던 A의 표정이 갑자기 하얗게 질렸다.
“언니, 나 소송걸렸대.”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십팔 개월의 장기근속(?)에 따른 퇴직금 문제와 퇴직이유에 따른 실업급여가 연관된 내용인가보다 할 뿐 B도 나도 어이없고 황당한 상황에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그렇게까지....”
걱정하는 내 표정이 너무 진지했는지 A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언니, 걱정하지 마요. 난 잘못한 게 없으니까 밝혀지겠죠. 통화녹음 증거도 가지고 있어요.”
다소 마음이 놓이기는 했지만, 누군가를 작정하고 망치기로 마음먹으면 못 할 일이 없는 요즘 들리는 얘기들을 보면 여전히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도 여리디 여리던 A가 그 사이 꽤나 단단해진 것같아 그나마 안심이 됐다.
다음날에는 고등학교 친구 둘을 만났다.
C는 아직 직장에 다니고 있고 D는 돈벌이로 하던 일을 지금은 봉사로 틈틈이 하고 있다고 했다.
만난 장소는 C가 추천한 강남에 있는 한정식집이었는데 식당 오픈 전부터 입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게다가 식당과 같은 층에 결혼식장이 있었는데 예식시간이 다 된 듯 복도는 온통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시골(?)에 오래 살다보니 토요일 오후 강남의 진풍경을 잠시 잊고 있었나보다.
그나마 식탁과 식탁 사이가 멀어 식당 안은 덜 혼잡한 느낌이었는데 신기한 건 그 곳에 온 손님이 대부분 육칠십 대 쯤의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근거는 없지만, 나이든 여성들은 한정식을 좋아하나보다 생각했다.
강남은 아니지만 서울에 있는 사무실에 근무를 하고 있어서인지 C는 북적거리는 인파가 전혀 불편하지 않은 모양으로 커피는 같은 층, 바로 예식장 앞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마시자고 했다. 우리 동네 커피숍을 열 개쯤 터 놓은 것처럼 엄청 넓은 그 곳에서 딱히 오붓한 자리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매장의 한 중간 어디쯤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하러 가는데만 한 나절이 걸렸다.
고등학교 때, 얼굴이 예쁜데 공부도 잘하고 자칭 음치라면서 놀기도 잘하던 B는 지쳐보였다.
내년 쯤에 아들이 로스쿨을 졸업하면 일을 그만 둘거라고 했다.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자기 혈액형이 오형인 줄 알았다던 D는 B형으로 바뀐 지금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취미도 많고 아는 오빠 아는 언니도 많았으며 남들 한 가지도 경험해보기 어려운 직업을 다양하게 가져보기도 했었다. 나는 D의 재능 성격이 모두 부러웠지만 그 중 풋풋한, 애틋한, 불같은 등 다양한 연애를 했던 것이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지금 그는 근처에 시아버님을 모시고, 친정어머니 병수발을 들며 지고지순한 일상을 살고 있다.
딸이 하나 있지만 나이가 들어도 해맑기만한 순수청년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아들같은 남편까지 케어느라 정작 자신이 하고싶은 일이 뭔지는 까맣게 잊어버린 그녀에게
“너 피가 바뀌더니 사람도 바뀐 것 같아.”
라고 말했더니 깔깔 웃었다.
천변길을 걷다보니 가꾸지 않은 잡풀 숲에 개망초가 여기저기 무성하다.
외래종이라 무섭게 번지고 그러느라 토종 식물을 자라지 못하게 한다고 하던가.
저걸 보일때마다 뽑아버려야 하나 어쩌나, 하는 생각에 지나다닐 때마다 마음이 불폈했었다.
그 날은 햇볕이 개망초 무더기 위로 한바닥 쏟아져 화사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무척 예뻤다.
나도 모르게 ‘개망초도 예쁘네.’ 라고 중얼거렸다.
문득 내가 알던 사람, 아는 친구, 지금 곁에 있는 사람 모두
어쩌면 내가 아는 것보다 더 귀하고 예쁜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싶은 면만 보고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옳다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그렇다.
늘 부족하고 모자라서 주눅들고 움츠러들어 겉돌던 나 역시
숨고르고, 눈 씻고, 꼼꼼하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잘 보면
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바람 한줄기가 스치면서 진한 향기가 났다.
‘개망초에 향기가 있었나?’
하며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데
그 곳에는 개망초 말고도 이름모를 꽃들이 자잘하게 끝도 없이 피어있었다.
개망초는 이름이라도 알았지, 왠지 이름도 모르는 그 많은 꽃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못알아봐서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