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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쌀밥에 괴깃국

by 이연숙


K가 당뇨 진단을 받은 것은 이십여 년 전이다.

음식은 배가 고픈 것을 면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여기는 나에 비해 K는 음식에 대해,

나아가 먹는 행위에 대해 매우 경건하고 진지한 태도로 임한다.

그런 그의 자세는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식사전 습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요리에 대해 잘 몰라도 음식의 온도에 대해서 만큼은 예민한 나는

샐러드 등 찬 음식을 먼저 차려 놓고 그 외 반찬을 담아 놓은 다음 밥을 푸고 국은 맨 나중에 떠 놓는다.

물론 이 정도 쯤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건 안다.

K라고 그걸 모를리는 없을텐데 그는 식탁을 다 차려놓으면 그 때부터 분주해진다.

식전 약을 먹고 TV든 ott든 시청할 프로그램을 고르고 식기세척기에 세제를 넣고 나와있는 그릇을 넣어 설거지할 준비를 하고 심지어 분리수거 날에는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기까지 한다. 주변을 모두 정리해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겠다는 그의 습관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다 필요한 일이고 해야할 일인건 알겠는데 그게 왜 하필 밥상을 차려놓은 다음인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그럴 때마다 시어머니가 시아버지한테 숱하게 쏟아내던 잔소리 한 구절이 저절로 떠오른다.


“하여간, 내도록 있다가 꼭 밥상 차려놓으면 어디로 가요. 으이구 으이구.”


당황한 눈길로 아버님을 좇으면 시아버지는 마당에서 담배를 피거나 화장실로 들어가거나 창고에서 뭔가를 찾느라 분주하다. 함께 사는 게 아니니 얼마나 자주 그러시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봐도 이상하기는 했다.

그러느라 국은 식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던 밥은 까슬해지고 샐러드에서는 물이 생기고 달걀말이는 뻣뻣해진다. 그렇다고 시어머니처럼 매번 똑같은 잔소리 폭탄을 퍼붓기에는 기력이 달려 그냥 나 먼저 숟가락 들고 식사를 시작한다.

미리 시작한데다 식사량도 많지 않고 게다가 배고프면 숟가락질이 바빠지는 내가 먼저 식사를 끝낸 후에도 K의 식사는 우아하고 품위있게 한참 동안 계속 된다.

덕분에, 어렸을 때 남자형제들과 밥을 먹으면서 했던 ‘꼴찌 먹는 사람이 설거지 하기’ 내기를 할 필요도 없이 설거지는 언제나 K 당첨이다.

남편이 기저질환을 가지고 있지만, 말하자면 그의 보호자 격인 내가 특별하게 하는 일은 없다. 인터넷이며 건강서적, 유투브에 넘치는 정보를 가지고 아침마다 건강주스부터 온갖 즙을 먹이는 바람에 물배가 부르다는 남편도 있고 아예 살림을 정리해서 산으로 들어갔다는 부부도 있지만 내가 하는 거라고는 고작 샐러드와 현미밥 정도다.

오랫동안 나도 현미밥을 먹었다.

적어도 나는 당뇨 예방은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바람과는 달리 나의 부실한 위장사정 때문에 요즘은 본의 아니게 밥을 두 종류로 하게 됐다.

한 끼 먹자고 일 인분씩 두 번 밥을 할 수는 없어 현미밥 한 번, 백미밥 한 번 해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나흘 정도 먹으니 한결 수월했다.


20250627흰쌀밥에 고깃국.jpg


이번 주는 K의 생일 주간이다.

음력 날짜로 출생신고를 하신 시부모님 덕분(?)에 해마다 이맘 때쯤 되면 K는 시도때도 없이 생일 축하를 받느라 바쁘다.

달력에 표시된 음력 날짜에 한 번, 양력 날짜에 한 번, 게다가 요즘은 똑똑해진 메신저 덕분에 양력으로 환산된 음력 날짜에까지 축하전화가 온다. 정작 당사자는 오늘이 내 생일이냐며 무덤덤한 척 하지만 그의 생일은 전국민이 (다른 의미로)잊지말자고 부르짖는 6월 25일이다.

하여 깜박 잊었다는 말이 통할 리 없는 그의 생일 아침에

소고기를 넣어 미역국을 끓이고 마침 냉동밥이 없어 빨리 할 수 있는 흰쌀밥을 지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생일날에

수령님(?)만 드신다는 흰쌀밥에 괴깃국을 먹게 되었다.

당뇨환자한테 웬 쌀밥이냐고 불평은커녕 덜어준 밥 한 그릇을 달게 먹다가 국에 말아 싹 다 비운다.

그러더니 오랜만에 먹어 그런가 쌀밥이 맛있다고 입맛까지 다신다.

그 말이 어쩐지 짠하게 들렸다.

국수를 좋아해서 육인 분을 삶아 일인 분씩 나눠담고 혼자 삼인 분을 다 먹던 그가

흰밀국수나 메밀국수나 다 마찬가지라는 담당의사 말에 국수를 끊고

복숭아 두 개를 깎아 놓았을 때 내가 두 쪽 먹으면 어느틈에 남은 복숭아 다 해치우고 접시까지 씻어놓던 그가 하필 먹을 것을 제한해야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K는 생일날에 흰쌀밥에 소고기미역국을 두 끼나 먹었다.

그 날 당수치가 튀어 올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왜 맛있는 음식은 대부분 건강에 좋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건강에 이롭지 않은 음식에 끌리는 걸까.

이러면 안 되지만 나는 그래도 K가 밥을 맛있게 먹을 때 행복한 표정이 좋다.

그나마 생일이 일 년에 한 번이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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