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가 집에 들어오면서 문앞에 있던 택배 상자를 들고 온다. 몇 년 전만 해도 책 택배가 오면
“책을 또 샀어?”
“지난 번 산 건 다 읽기는 했어?”
라고 묻고는 했다. 이삼 주 사이에 책 네 권을 다 읽었을 리 없다. 그 때는 지금보다 배짱이 없던 터라 얼굴만 빨개질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죄인처럼 눈길을 피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책 쇼핑 횟수가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다 읽지 못하고 꽂히는 책의 수는 늘어갔다. 책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읽지도 않고 쌓이는 책을 두고도 또 인터넷 서점을 기웃거리는 내가 스스로 의아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다. 곰곰 생각해보면 그런 상황은 대부분 뭔가 불안하거나 집중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거지로 책쇼핑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물론 그 사이에 종종 다 읽었거나, 안 읽었지만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을 골라 중고사이트에 팔기도 했다.
언젠가 방송에서 유명작가가 했던 말을 마음에 새기며 적당히 뻔뻔해지기로 했다.
일테면 ‘책을 샀다고 다 읽어야만 되는 건 아니다.’ ‘어떤 때는 전에 산 줄 모르고 같은 책을 또 산 적도 있다.’ ‘끝까지 다 읽지 않을 때도 많다.’ 등 이다.
이게 마음에까지 새길 일인가 싶으면서도 어쩐지 마음속으로는 ‘어머! 나만 그런게 아니었어.’하는 마음에 다음에 K가 또 뭐라고 하면 나도 당당하게 말해야지 벼르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이미 알아차린건지 요즘은 책이 든 상자를 들고 들어오면서도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가끔 한 번씩 소파에 앉아 책으로 가득찬 벽을 보면서
‘저걸 다 어떡하나. 내가 떠나면 다 쓰레기가 될텐데,’
라는 생각이 불쑥 들고는 한다.
그러다 이내, 그건 내 알바가 아니지. 남은 사람들이 갖고 싶은 책을 골라 갖든, 중고서점에 팔든 그것도 귀찮아 그냥 쓰레기로 버리든, 이라는 의미없는 결론에 이른다.
모르긴 몰라도 사는동안 책 사는일을 멈추는 일도, 가지고 있는 책을 몽땅 정리하는 일도 없을 거라는 걸 안다.
왜냐하면 책은 이집에서 내맘대로 하고 싶은 유일한 내 영역이기 때문이다.
(K가 들으면 이 집에서 내 휴대폰 말고 네 것이 아닌게 있기는 하냐고 따질지도 모르지만.)
온라인으로만 식재료 쇼핑을 하다가 모처럼 마트에 갔다.
K의 안경을 맞추고 메모해 온 식재료를 사러 지하층으로 갔다.
온라인으로 구매할 때 가격이 오르다 오르다 무려 칠천 원까지 갔던 양배추가 이천원대에 통도 단단하고 크다. 오프라인 쇼핑의 단점인 ‘이왕 나온 김에’가 또 발동해서 K가 그 큰 양배추를 두 통이나 들고 내가 당근과 양파를 양 손에 들었다. 적어 온 걸 찾았으니 계산대로 가려고 하는데 K가 뒤에서 불쑥 대파를 내민다.
“이건 어떡할까요? 지난 번에 산게 있기는 한데 나온김에 하나 더 살까요?”
대파가 몽둥이처럼 느껴지기도 처음이다. 이 무렵에는 대파가 억세서 중파를 사야하지만 이미 사 둔 대파가 있으니 필요 없을 것 같다, 고 말하는 대신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건 내가 쓸 일 없는데요.”
K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걸 사지 않기를 잘했다는 것은 마트 문을 나서면서 격하게 절감했을 것 같다.
마치 한 겨울에 밖에서 집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문을 엶과 동시에 난방 잘 된 방처럼 훈훈한 공기가 달려들었다. 산책삼아 걸어온 길을 뙤약볕 아래 되돌아가야 한다.
될수록 그늘이 진 길로만 간다며 요리조리 길을 바꿔가지만 적어도 십 킬로그램은 될 것 같은 장바구니를 든 K의 몸에서는 벌써부터 땀이 줄줄 흐른다.
미련한 짓을 했다 싶었다.
운동이고 뭐고 차를 가져갔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식탁에 앉아 일본어 숙제를, K는 사 온 양배추로 콜슬로를 만들고 있었다.
켜 놓은 TV에서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이젠 쉽게쉽게 살 거야.” 라는 아내 말에
“언젠 뭐 어렵게 사셨나?”
라는 부부의 말이 뇌리에 꽂혔다.
맞아, 쉽게 살아야지 인생도 짧은데...
그 광고 참 볼수록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