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 단골 됐나봐

by 이연숙


범계역 로데오거리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붕어빵과 옥수수포차가 있다.

그 앞을 지나는 상황은 대부분 버스를 기다리거나 지하철에서 나올 때가 많고 가끔은 은행이나 병원 볼일을 보러 지나칠 때였다.

그렇다보니 먹고싶다, 하면서도 ‘오는 길에 사야지’ 혹은 ‘집에 갈 때 사야지.’ 하고는 잊어버리고는 했다.


“내 맨날 여 올 때마다 옥수수를 사다 여름내 먹었더니 살쪘어.”


라며 징징거리는 일본어 메이트 A를 보면서 살이 찌더라도 내년 여름에는 일본어 올 때마다 꼭 사다 먹을 거라고 작년 가을 무렵 결심했었다.

그리고 올해 여름이 왔을 때, 수업이 끝나고 작정하고 길을 건너 갔더니 옥수수포차가 꽁꽁 싸매져있었다. 아마도 극심한 무더위로 잠정 휴업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돌아서려는데 건너편 붕어빵 포차는 여전히 성업중이었다.

그리고 또 몇 주가 지나 다시 그 곳에 갔을 때는 지갑에 현금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후 지하철무빙워크를 타고 올라와 버스를 타러 그 곳을 지나치는데

신ㅇ은행 계좌번호와 김ㅇ호라는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요즘은 재래시장에서도 신용카드대신 계좌이체로 물건값을 치르는 경우가 많이 있었던게 기억이 났다. 옥수수 포차에는 전에도 있었는데 내가 못 본 건지, 이제부터 그렇게 하기로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현금이 없어서 사지 못하는 일은 없게 된 거다.

그런데 또 막상, 안경없이는 카톡도 보지 못하면서 복잡한 길거리, 김 모락모락 나는 찜통 앞에서 더듬더듬 계좌번호를 찍을 생각을 하니 민망해서 그 것도 못하겠다.

여전히 올해도 옥수수는 못 먹어보고 지나가려나보다 하다가 병원에 갔던날 휴진이라 허탕치고 돌아오던 길에 급기야 용기를 냈다.

행겨 오타를 찍을새라 숫자를 한 자 한 자 찍어 넣는 동안 오가는 사람들에게 툭툭 치이기도 했다. ‘너 뭐하냐?’라는 표정으로 볼 것 같은 주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외면한 채 마침내 사 천원을 이체하고 찰옥수수 한 봉다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걸로 저녁을 먹을 테니 그대는 알아서 드시오, 라고 말하고는 앉은 자리에서 굵은 옥수수 세자루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처음이 어려웠지 두 번 세 번째는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리고 며칠 전,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라 집에 오는 길에 또 옥수수를 사러 갔다.


“하얀색으로 주세요.”


하고는 어플을 열고 수신계좌번호를 찍는데 두 글자 찍으니 자동완성이 된다.

잘못 찍었나 싶어 지우고 다시 처음부터 한글자씩 봐 가며 찍는데 어라? 이번에도 자동완성이 되더니 수신인 김ㅇ호,까지 뜬다. 혹시나 해서 자동완성된 숫자를 대조해보니 그 번호가 맞았다.

어느 사이에 자주사용하는 계좌번호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민망하기도 하면서 한 편 이 상황이 웃겼다.

밤에 집에 온 K가 저녁은 먹었냐고 물었다.


“응 옥수수를 먹었는데 말야.”

“으이구 밥을 먹지.”

“세상에, 나 옥수수집 단골 됐나봐.”


했더니 킥킥거리며 웃었다.


20250822어머나, 나 단골됐나봐.jpg


일본어교실에 다니면서 가까워진 친구들이 있다.

구 월 새학기 등록을 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A는 영어를 배우고 싶다며 일본어 등록을 하지 않았고 B는 접수를 했는데 추첨에서 떨어져 대기상태이고 나만 남게 되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지’라고 삐딱하게 애써 서운한 마음을 누르는데 A가 옆건물 센터에 개설된 일본어 회화강의를 같이 듣자고 한다.

지금 하는 것도 죽지 못해 하고 있는데 다른 강좌를 더 듣자고 하니 기가찼다.

늘 달고 사는 말, ‘내가 일본여행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본을 엄청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을 늘어놓으며 난 안한다고 했다가 가만 생각하니 어차피 이제까지 해왔으니 다른 선생님의 수업을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더 큰 이유는 뿔뿔이 흩어질 뻔한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좋았다.

느려터진 네트워크 환경 때문에 거의 두시간에 걸친 씨름 끝에 세 명 모두 등록을 마치고나니 도원결의라도 맺은 것처럼 마음이 뿌듯해진다.

아홉 살이나 아래인 A와는 초급반부터 같이 한 사이지만 이렇게까지 친해지게 될 줄은 몰랐다.

세 살 아래인 B의 첫 인상은 수퍼 깔끔이였다. 아침에 교실에 오면 가방 벗어놓고 사라지더니 휴지에 물을 묻혀와 옆짝꿍 자리까지 꼼꼼하게 닦는 것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깡마른 몸매에 단아한 목소리는 선뜻 말을 붙이기도 어려워보였으니 그와 어울려 함께 밥을 먹고 스터디를 하게 될 줄, 그 때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가장 문제수강생은 단연 나였다. 그들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난 그만 둬야겠다, 여기까지인가보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등등 온갖 앓는 소리를 하며 징징거렸으니 그걸 참아준 그들이 대단하다.

여하튼, 처음은 늘 어려웠지만

비장한 각오를 하지 않더라도 무심히 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니

단골도 되고 친구도 생겼다.

그래도 옥수수는 이제 그만 먹어야 할까보다.

나도 A처럼 살이 찐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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