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특공대 출신이라면서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했다.
고소공포증이라면서 패러글라이딩을 해 보는게 소원이라고 했었다.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와서는 고소공포증과 패러글라이딩은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했다.
아마도 선택적 공포증인가보다 했다.
나는 놀이공원에 가면 바이킹 타기를 좋아했다.
눈을 뜨고 타지는 못하지만 그 시절 청룡열차를 탔을 때 무척 짜릿하면서 재미있었다.
마지막으로 롤러코스터를 탄 것은 첫아이 임신 육개월 쯤 무렵이었다.
K는 두고두고 그 때 얘기를 하며 놀렸다.
그러면서 눈 감고 탈거면 그게 무슨 재미냐고도 했었다.
K의 직장 답사동호회를 따라 울릉도에 간 적이 있었다.
전망대였던 것 같은데 무척 높이 올라갔다가 계단을 걸어 내려올 때였다.
벽도 없는 전망탑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회전형 계단을 내려 올 때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잔뜩 겁을 먹고 난간을 꼭 붙잡은 채 기다시피 하면서 내려가고 있었다.
그 쯤 되면 정의의 특공대출신 남편이 뭘 이정도 가지고 그러냐며 손을 잡아 줄 줄 알았다.
그런데 내 뒤 쪽에서 내려오던 K가 나를 가볍게 지나치면서
“어~ 무서워. 나 고소공포증인가봐,”
한다.
두 손은 허공에 둔 채 비틀거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말도 안 돼. 특공대 출신이라며. 특공대에서는 막 헬기에서 뛰어내리고 그런다며, 산으로 들로 밤새 행군도 자주 한다며.”
공수훈련은 지상훈련만 했고 행군은 힘들었지만 체질인 것 같다고 했다.
TV로 배운 특공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 후로 K는 자신이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틈만 나면 온 몸으로 표현을 했다.
한국에 처음 온 외국인들이 L타워에 가서 투명 유리바닥에 눕는 장면을 보고 다리가 저리다고 했고 강 한가운데로 부상교를 놓은 지역 장면을 보면서는 대체 왜 자꾸 저런걸 놓는지 모르겠다고 화를 냈다. 스카이워크, 출렁다리, 번지점프 장면이 나올 때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가하면 나는 오히려 점점 대범해지는 느낌이다.
아파트 오층 높이에서 강물 위로 떨어지는 번지점프를 나도 해보고 싶다고 했고 짚라인을 타고 강을 건너보는 것도 신날 것 같다. 오래 전에 내가 탔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되게 진화한 롤러코스터를 이제는 눈을 뜨고 탈 수 있을 것 같고 스카이다이빙을 하다가는 죽어도 행복할 것 같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용솟음쳤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마구 솟아나는 객기 일지도 모른다.
바닷가로 이어지는 언덕을 넘어 전에 묵었던 숙소가 있는 포구동네를 지나 두 번째 언덕길의 반쯤에서 되돌아오면 삼 킬로미터가 된다.
아침마다 그 길을 걷는다.
그 길을 십여 년 전에도 걸었고 지금도 걷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제주에 올 때면 걷게 될 것 같다.
언덕길을 오르다가 어느 지점이 되면 빨간 등대가 있는 아래 쪽 동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수십 번을 봤으면서도 볼 때마다 처음 보는 것처럼 감탄사가 나온다.
전에는 없던 숙박시설이 새로 생기고 돼지고기집이 건물을 지어 개업을 했다가 다음 번에 오니 간판이 바뀌는 등 그 안에서의 자잘자잘한 변화는 있었지만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동네는 언제나 그대로인 것처럼 보인다.
K의 고소공포증이,
원래 있었는데 모르고 지내다가 발현이 된 건지, 없었는데 나이들면서 생긴 변화인지는 모르겠다.
식구들중 누구도 놀이공원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니 타의로라도 놀이기구를 탈 일은 없겠지만 상상으로라도 소심했던 내가 대범한 사람이 되었다는게 어쩐지 뿌듯하다.
어쩌면 K와 나는 서서히 닮아가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지점을 지나 이제는 자기보다 상대의 모습쪽에 더 가까워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남편 혼자 두고 여행을 떠나는 아내, 여행 얘기만 나오면 침묵으로 일관하는 남편
축구를 좋아하는 남편, 스포츠 중계가 제일 싫은 아내
SBS를 좋아하는 남편, MBC만 고집하는 아내
더러 부딪히고 생각이 다를 때도 있지만
지금쯤은 우리도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그 아담한 동네처럼 얼핏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가기 사흘 전, 벌써부터 집에 갈 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