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를 위한 변칙

by 이연숙



나만 삐딱선을 타지 않으면 강사가 말하는 사년 팔개월은 늘 열려있을 줄 알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센터에 개설된 일본어 강좌는 주간 야간에 각각 초급과 중급반이 있다.

원칙대로라면 초급반 사 개월 수업을 한 후 중급반에서 다시 사 개월 수업을 하면 수료를 해야하는 구조다.

강사는 일본에서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십 년간 배워야 할 일본 한자를 여기서는 오 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마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수업인가를 학기가 바뀔 때마다 강조하고는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이해가 되지 않은 말이 그 말 뿐이 아니라서 더구나 질문 안하는 A형이라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벌써 삼 년차 수업에 등록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일본한자를 배우고싶은 마음이 진심이라면 스스로 경쟁이 덜한 반에 등록을 하고 중급반 수업을 듣는, 그러느라 행정실과 강사의 눈치를 보며 매 순간 조마조마한 것을 감수하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걸 강사가 먼저 했다.

공부를 이어하고자 하는 수강생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면서 주간 중급반에만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폐강이 될수도 있는 다른 수업까지 안전하게 유지하려는 큰 그림이기도 했다.

한가지 문제는 다른 시간에 등록하고 주간 중급반에 수업을 들으러 올 수강생의 숫자가 좌석 수보다 많을 때인데 신기하게도 몇 주 지나다보면 자연스럽게 해결이 됐다.

아직은 누구도 서서 수업을 한 사람을 본적은 없었다.

한일 관계의 흐름이나 일본의 지진 혹은 코로나 상황 때문에도 수강생모집 상황은 변동이 컸다고 한다.

한데 이 삼 년전의 엔화 하락부터 시작해서 요즘은 갈수록 일본어 교실 수강신청자가 늘어 전례없는 호황을 이루고 있다보니 강사는 수업신청 지도를 그리느라 머리가 아플지경이 됐다.

눈치도 없이, 이제 폐강될 걱정은 없으니 행복한 고민이겠다고 했다가 강사의 싸늘한 표정을 보고는 움찔했다. 이게 지금 심각하다며, 어쩌면 강사가 짤릴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그의 어깨가 정말로 축 쳐진 느낌이었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두 번째 수업에 갔을 때 강사가 초췌한 표정으로 눈물까지 보였다.

첫 수업이 끝나고 누군가 행정실에 민원을 넣었다고 했다.

정원은 삼십 명인데 어째서 교실에 사십 명이 있는 거냐고.

강사는, 그동안 별 일 없이 유지 돼 온 것은 수강생들의 말없는 배려와 이해 덕분이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고 말하며 울컥해서 말소리까지 떨렸다.

어찌됐든 본인이 자초한 일이니 이 번 학기는 그대로 진행하고 다시 문제가 되면 스스로 그만두겠다고까지 말했다.

걸핏하면 그만둬야겠다고 징징거렸던 내가 순간 민망했다.

초급반 동기 A의 경우를 보는 것 만으로도 상황이란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바뀌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던 거다. 그런 상황을 예측이라도 했던 것처럼 B는 한자책 전 급수 열 권을 미리 사두기도 했다.

다음 수업에는 교실이 북적거리지 않았다.

각각 자기가 등록한 반으로 출석을 할 모양이었다.

다행히 나는 이번 학기에는 주간 중급에 정상적으로 등록이 됐지만 순식간에 모르는 사람들만 앉아있는 교실이 낯설었다.

일어 숙제 하기 싫다고 싫다고 노래를 부르던 내가 어쩐지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의까지 생기는 기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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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라면 변칙을 조금 써도 괜찮은 거 아닐까.

그게 남을 해치거나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닌데 눈 한 번 질끈 감을 수도 있는 일 아닐까.

가만 생각해보니 나도 처음 중급반 수업에 갔을 때 기분이 나빠진 적이 있었다.

삼 회차 수업까지 짝꿍하고 오른 쪽 창가 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다음 수업에 갔을 때 그 자리에 사람은 없고 책 한 권 노트 한 권이 덜렁 놓여있었다.

이른바 자리 맡기 신공이라는 걸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뒷자리를 돌아보며 눈으로, 이거 맡은 거야? 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그제서야 옆 분단 뒷자리에 이미 앉아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A가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옮겨 앉으면서도 기분은 매우 나빴다.

그 자리 주인은 수업이 시작하고 오분이나 지난 다음에 왔다.

이 년 쯤 지난 후에 그 자리 앞 뒤로 앉는 사람들은 무척 오래된 선배(?)들이고 그들은 새학기가 시작되고 세 번 째 수업까지는 수업 내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네 번째부터 출석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질문을 안 할 뿐 아니라 건의 혹은 불평 그런걸 해 본적이 없는 나는 안 좋았던 기억을 쉽사리 떨쳐내지도 못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열심히 해보자는 결의와는 달리 여행을 하느라 수업 두 번이나 빠지게 되니 세상 더 할수 없이 홀가분하다.

교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지금으로서는 없다.

하지만 돌아가겠지

다음 학기에 변칙적인 수업등록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면 야간수업을 듣거나 그 때는 정말 그만 둘지도 모르겠다.


새삼 강사가 안타까우면서도 고맙다.

나는 언제 변칙을 불사하면서까지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나.

변칙이 안 된다면 원칙적으로 그가 오래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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