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는 잘 자라네

by 이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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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화에선가

아파트 거실 가득 허브를 키우면서

요가를 하다가 민트 잎 하나 따먹고

요리하면서 로즈마리를 따다 넣는 것을 보면서 좋겠다 싶었다.

나도 한 번 해보자고

인터넷으로 토분 열 개 주문하고

꽃시장에서 종류별로 허브를 사다 심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화분이 아까워서 이듬해에는

제라륨도 심고 수국도 심었는데

한 해 여름 어찌어찌 꽃을 피우더니 가을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

공기정화 식물인데 햇볕 자주 안 봐도 되고

물도 한 달에 한 번 정도거나

잊을만하면 한 번 주면 된다고 했던 스투키도 크루시아도 죽었다.

야심차게 시작했던 거실 허브농장의 꿈은

애꿎은 다른 식물들까지 희생시키고 나서야 끝이 났다.


이 후로 한두 번

꽃박람회가 열리는 호수공원에서 놀다가

넘실대는 꽃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제라륨과 유칼립투스, 몇 종류의 허브 그리고 수국을 샀는데

유칼립투스와 허브는 그 해 여름만 살고 간 것에 비해

기특하게도 수국은 이 후로도 해마다 잎을 틔웠고

작년에는 힘겹게 파란색 꽃도 피워냈었다.

신기한 건, 같이 사서 보냈던 딸네 집에서는

허브도 유칼립투스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는 거다.

바질이 너무 자라 가지를 잘라 물에 담가 놨는데 뿌리가 엄청 많이 나왔다며

집에 가서 화분에 심어 보려냐고 물었다.

자신은 없었지만 한 번 해보겠다고 했다.

화분에 옮겨 심고 나서 물을 주고

온종일 해를 따라 화분을 옮겨 다녔다.

그런 덕분인지 처음에는 잎의 색도 진해지고 가로 세로 짝을 이뤄 새 잎도 올라왔다.

먼저 나왔던 잎이 너무 많아져서 가지를 쳐서 다시 물에 꽂아 두었는데

거기서도 수염 같은 뿌리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금세 무성해졌다.

이대로라면 어쩌면 크리스마스 음식을 만들 때

잎 뿐 아니라 페스토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웬걸

한 달이나 지났을까?

아래쪽부터 잎이 하나씩 마르기 시작하더니

두 개 줄기의 잎이 모두 떨어져 버리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얀 수염 같은 뿌리를 마구 내리던 줄기마저 한 순간에 말라버렸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무슨 허브를...


라쟈냐 레시피에서 마지막으로 생모짜렐라 치즈를 듬뿍 덮은 후

바질 잎 두어 개 얹어주면 좋다고 했다.

차라리 그 집에 그냥 두었다가 지금 가져왔으면 좋았을걸.

크리스마스 장식을 벽에다 한 이유도

애꿎은 화분 하나 희생시키게 될까봐서 였다.

식물에 관한한 나는 똥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뭐, 어떻게 다 잘 할 수 있겠어? 라며 애써 위로하면서.


주방 정리를 하다가 아일랜드 테이블 위,

김장 때 심어 놓은 파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두 번이나 잘라서 먹었는데

또 키가 웃자라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도 없는데 혼잣말을 했다.


“그래도 파는 잘 자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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