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세상이 딱 두 시대로 나뉘는 것 같아요.
의류건조기 없던 시대와 있는 시대로요.“
평소 말투가 잔잔하고 조근조근하던 목공 선생님이
모처럼 목에 힘까지 줘가며 했던 말이었다.
“그 정도예요?”
“일단 써보세요. 후회 안 해요.”
모름지기 빨래는 팡팡 털어 햇볕에 너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겨울이면 마르기도 전에 얼어버리는 건 다반사였다.
아파트 생활이 보편화 되면서부터
팡팡 털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테라스 햇볕은 다른 건물 때문에 시와 때를 가렸다.
겨울이면 가습 효과를 준다며 집 안에 널기도 했는데
어떤 때는 실내에 넌 빨래에서 쿰쿰한 냄새가 나기도 했다.
이 전에 살던 집은 동향의 1층이었다.
겨울이면 햇볕이 들지 않아 빨래가 늘 눅눅한 느낌이라
어떤 집은 동과 동 사이 해가 드는 자리에 빨래 건조대를 내 놓고
빨래를 말리거나 이불을 거풍하기도 했다.
한동안 DIY가구를 배우러 다닐 때
선생님과 그 얘기를 하던 참이었다.
귀가 솔깃하는 말이기는 했지만
그게 어디 한두 푼이라야 말이지.
딸이 결혼을 하면서 혼수 제 1호로 의류 건조기를 계약했다.
건조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두 말하면 입 아프다고 했다.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을 것이고
지금 사용하는 독일산 세탁기 세트제품의 가격은 국산에 비해 두 배가 넘었고
놓을 자리도 마땅치 않은 등
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지만
기어이 건조기를 들여놓은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곧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던 K가 은퇴를 하고 나면
거금을 들여 가전제품을 들이는 일은 못할 것 같아서 였다.
예전에는 세탁물을 분류해 세탁하고 널고 걷고 개서 옷장에 정리를 할 때 까지 시간이
약 사흘 쯤 걸렸다고 하면
건조기를 들인 이후에는 하루 만에 끝난다는 점은 시대가 바뀐 느낌이 분명했다.
하지만 회가 거듭할수록 드러나는 건조기의 진실은 마냥 좋기만 하지 않았다.
면 소재 트레이닝 바지가 점점 줄어 종아리까지 올라오는가 하면
울 제품은 안 되고, 폴리 소재도 안 되고
블라우스도 안 되고, 니트도 안 되고 안 되고 안 되고 등등등등
구입했던 온라인 쇼핑몰에 옷이 줄었다는 문의를 했더니 상담원이 말했다.
“의류 건조기로는 수건이나 양말 같은 것만 건조하셔야 해요.”
“......”
이제는 익숙해져 의류건조기가 없던 시절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딸부부와 식세기냐 음처기냐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
별걸 다 줄인다는 요즘
식세기가 갖고 싶다는 사위의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들었다.
식기 세척기를 줄였다는 것을 더듬더듬 알아차리고는
원래 알아들은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 집은 얼마 전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를 샀다고 했다.
어디에 빌트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크기가 작지도 않은 것이 주방 한 가운데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 안에는 미생물이 산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줄곧 뭔가가 소리를 내고 있었고
가끔은 덜컥! 예상치 못한 소음이 들릴 때도 있다고 했다.
미생물이 음식물을 분해해서 처리하기 때문에
그 것을 들인 이후로 음쓰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은 이제 없다며
그야말로 세상이 바뀐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또 다시 그 것에 대해 생각에 빠졌다.
그냥 음식물 수거통에 버리면 될 것을
(이거, 내가 안 하고 K가 한다고 해서 결코 쉽게 보는 거 아님 주의)
돈 들여, 공간 차지해, 24시간 끊이지 않는 자잘한 소음에
게다가 미생물님 자극 되면 안 되니까
너무 맵거나 짜거나 거친 것들은 씻거나 잘라서 넣어드려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음처기 사지 말고 식세기를 사지 그랬냐는 내 말에
딸은 음처기(이렇게 쓰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 맘대로 줄임)를 산 것은
세상 잘 한 일이었다며 엄마도 써보라고 했다.
그..글 쎄
..
엄마가 벗어놓은 속옷을 세탁해서 건조기를 돌려
방금 나온 빵처럼 따뜻한 옷을 건네 드리니 엄마가 말했다.
“세상 참 좋아졌네.”
그 말끝에는 항상,
세상이 너무 뭐가 자꾸 바뀌고 복잡해서 도무지 하나도 모르겠다고도 했다.
세상이 점점 더 편하고 좋은 것들로 바뀌어가니
오래 살아야 그런 게 있는 줄도 알지 않겠냐고
그러니 자꾸 늙은이가 빨리 죽어야하는데, 라는 말 하지 말라고, 엄마에게 말하고 보니
어째 내 마음은 동의하지 않는 것 같은 눈치다.
나는 그냥
설거지 하는 K, 음쓰 버리는 K가
오래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