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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zip

by 걍마늘

갑자기 눈이 쏟아졌다. 경춘국도에서 강촌교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는데 내리는 기세를 보니 금방 그칠 것 같지는 않았다.

우회전 깜빡이를 켜고 천천히 핸들을 꺾었다. 기차역 앞에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더플코트에 털모자를 쓴 여자애가 배를 잡고 웃는다. 그러자 파카 소녀가 털모자보다 더 크게 웃으며 손뼉을 친다. 기차를 기다리며 무슨 게임 같은 걸 하고 있는 모양이다. 웃음이 전염병처럼 주변으로 번졌다.

“강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에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 담배를 사러 나가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밤새 전화를 받지 않은 유경의 전화였다. 그녀는 구곡폭포 부근에서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길을 잃고 헤매다 간신히 기차역까지 왔다며 데리러 와달라고 했다. 기차표를 살 돈이 없다는 것이다. 가진 돈을 다 털어 3차까지 간 게 실수였다고 칭얼댔다. 어이가 없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돌아올 차비도 안 남긴 거야?”

“학회장이 미리 표를 끊어놨었거든.”




유경은 처음 보는 하늘색 코트 차림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녀 곁을 지나쳐 길가에 차를 세운다. 큼지막한 눈송이가 차창 위로 툭툭 떨어졌다.

“오빠!”

그녀는 따뜻한 커피가 마시고 싶다며 근처 찻집으로 나를 끌고 갔다. 우리는 머리에 쌓인 눈을 탈탈 털고 안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 북한강과 강촌교, 해발 530미터의 검봉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다.

“예쁘다. 황량했는데, 하얀 꽃으로 뒤덮인 것 같아.”

나는 오래전에 그녀가 선물한 목도리를 끌러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내가 선물한 목도리를 하고 있지 않았다. 안에 입은 분홍색 터틀넥 스웨터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종업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내민다. 나는 평소처럼 블루마운틴 두 잔을 주문했다. 그러자 코트를 벗은 그녀가 “블루마운틴 하나, 비엔나 하나”라고 주문을 정정한다.

“비엔나?”

달착지근해 싫다던 커피다.

“눈 오는 날 하얀 휘핑크림과 커피, 잘 어울리지 않아? 참, 이거…….”

코트에서 던힐 멘솔을 내 내 앞에다 놓았다. 보통 담배는 목이 아파 못 피우겠다며 박하담배로 바꾼 것이 얼마 전이다.

“오빠 펴.”

“왜? 끊게?”

“술도 끊을 거야.”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과 립글로스만 바른 화장기 없는 얼굴이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마음에 걸린다.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마주하고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꼭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거 같아. 세상이… 어딘가… 동화 속 풍경 같지 않아? 착한 사람들만 살고 있을 거 같고.”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왔다. 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다보며 묵묵히 휘핑크림을 휘저었다. 그녀 뒤에는 떠나는지 도착하는지 모르겠는 기차 그림이 걸렸다. 모네 같았다.

“분홍색 스웨터가 있었나? 코트도 처음 보는 건데.”

“전에 보지 않았나? 언니가 시집가면서 준 건데.”

유경은 다람취처럼 잔을 들고 커피를 홀짝이다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그녀와 잠깐 시선이 마주쳤다. 거짓말이다. 눈은 정직하다. 밖을 봤다. 그새 기차가 왔다 갔는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역 앞이 썰렁했다. 눈발도 거짓말처럼 가늘어졌다.

“피곤하다.” 그녀가 소파 깊숙이 몸을 묻는다. “술을 마시는 게 아닌데.”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았다. “잠깐만 잘게. 미안.”

스피커에서는 철 지난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이미 떠난 사람일지 이제 떠날 사람일지 모를 이를 떠나보내는 애절한 노래였는데 아무래도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녀는 플레이리스트가 한 바퀴 돌아 들어올 때 나온 노래가 다시 나올 때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 식은 블루마운틴을 한입에 들이켠다. 앞에 놓인 담뱃갑을 집어 들고 밖으로갔다. 출입문 앞에서 그녀가 피우던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박하라서 그런지 차가운 공기가 더 차갑게 느껴진다.

도로로 내려서는데 첨벙하고 흙탕물에 발이 빠졌다. 얼른 뒤로 물러나 마른 곳을 찾았다. 3월에 웬 함박눈인가 싶더니만 그래도 봄이라 벌써 지저분하게 녹았다. 진창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처럼 내린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도 그렇게 녹아버린 듯했다.

2인용 자전거를 탄 남녀가 지나간다. 뒷자리에 탄 여자의 등에 후드득, 새까만 흙탕물이 튄다. 그들은 아랑곳이 없다. 우리가 한때 그러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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