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공 창을 통과한 햇살은 다락방 안쪽 가장 깊숙한 곳까지 닿았다. 바닥과 단차가 있어 침대처럼 누워 잘 수도, 벤치처럼 걸터앉을 수도 있는 자리가 있었다. 나는 그 위로 올라가 책장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닥터스>가 보이고, 그 옆에는 <개 같은 내 인생>이, 그리고 그 옆에는 <슬픔이여 안녕>이 있다. 언젠가 나도 그 소설들을 읽었다. 책에도 유행이 있고, 유행이라서 우연히 읽은 책들 가운데 하나다.
사강을 꺼내 펼쳤다. 누렇게 빛이 바랜 페이지 한쪽에 누군가의 손때가 묻었다. 코카인 복용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그녀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대체로는 나를 파괴할 권리에 무게 중심을 둘 것이고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나,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책을 도로 꽂았다. 어쨌거나 아직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다. 아내가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했고, 집은 빨래 널 데가 없을 만큼 좁았으며, 사놓고 읽지 않은 책도 한 무더기다. 하지만 내가 가져가지 않으면 결국 폐휴지가 되고 말겠지. 어쩌면 영원히 화해할 수 없게 된 아버지와 아들의 흔적들까지 모두 다.
나란히 꽂힌 <지옥에서 보낸 한철>과 <악의 꽃>이 눈에 띈다. 읽어 보고 싶긴 했으나 선뜻 손이 가지 않은 시집이다. 나는 사춘기가 늦었다.
책장 맨 위 칸에는 여닫이문이 달렸다. 열어 보니 <베르니케와 브로카의 평행선>이라는 이상한 제목의 책 십 수 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고모부가 자비로 출판했다는 소설 같았다.
소설은 대뇌피질의 한 영역인 베르니케령과 브로카령에 관한 방대한 서술로 시작되었다. 베르니케령은 언어를 해석하는 부위고 브로카령은 말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부위로 이상이 있으면 의사소통에 장애가 생긴다는 이야기 같았다. 다만 설명이 지나치게 세세하고 장황해 글자를 읽은 것은 분명한데 남는 것이 없었다. 말이 많은 베르니케는 브로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대답을 못 한다고 착각하고, 말이 없는 브로카는 베르니케의 말이 말이 안 되는 말임을 이해하지만 자신이 생각한 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침묵할 뿐이라는 설정은 흥미로웠다.
재종형의 당선작이 실린 <월간 문예>도 세 권이나 있었다. 사진 속 재종형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어느 학교에나 최소한 한 명쯤은 있을 법한 얼굴이랄까. 그러나 그의 시는 그러한 인상을 뒤집을 만큼 훌륭했다. 열여덟 살짜리가 쓴 시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질투와 절망감에 공감했다.
탐색을 마친 나는 존 레넌과 오노 요코 위에 랭보와 보들레르를, 고모부의 소설과 재종형의 시가 실린 문예지를 얹었다. 어쩌면 끝끝내 읽지 못할 원서들도 따로 모았다. 내가 구한 책은 그 정도였다. 이제 아들과 쌓은 문학의 성채를 해체할 일만 남았다.
노끈을 찾는데 그제야 성채 뒤에 놓인 이삿짐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움직여 보니 묵직한 것이 책인가 싶었으나 테이프로 봉인되어 있어 싸 놓은 짐인지 풀지 않은 짐인지 불확실하다.
아들의 비행기를 책상 위로 옮긴 뒤 봉인 테이프를 뜯었다. 상자 안에는 페이퍼백과 스프링 노트와 스케치북과 마리오네트 따위가 들었다. 마리오네트는 코가 자란 피노키오 목각 인형이다. 스케치북을 열어보았다. 콩테로 스케치한 오솔길과 들판과 강과 거리들이다. 젊은 여자와 어린아이, 할머니를 그린 초상화도 있었다. 스프링 노트에는 메모인지 시인지 알 수 없는 짧은 글을 온갖 언어로 적었다. 페이퍼백들 또한 죄다 외국어 원서인 데다 저자마저 생소해 확실치는 않았지만 소설 같았다. 그런데, 젖었다 말라 나무껍질처럼 쭈글쭈글해진 손바닥만 한 노트가 그 틈에서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노트를 펼치려다 포기한다. 페이지들이 서로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관념적인 외투의 터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샤를빌에서 몬타뇰라까지 걸어서 가는 한 소년을 상상한다. 터진 바지를 입고 각운을 흘리며 라인 강을 따라 걷다가 강가에 앉아 별들의 수런거림에 귀를 기울이고 머리카락에 맺힌 이슬을 술처럼 느끼며 일어나 터진 구두의 끈을 리라 타듯 잡아당기는 소년을.
일부러 강에 뛰어들었을 수도 있지만 사고로 물에 빠졌을 수도 있다. 창문을 열고 외출했는데 하필이면 비가 왔을지도 모른다. 허름한 하숙집 천장에서 비가 샜을 수도 있고, 단순히 물을 엎질렀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애너벨 리와 바닷가 왕국에서 사랑을 나누다 실수로 물속에 빠트렸을지도 모른다. 젖은 노트에 대해 상상을 나래를 펼치자면 아마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나와는 무관했다. 당고모나 아버지에게 듣지 않는 이상 나는 그의 죽음에 관해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간직한, 혹은 그녀가 끝끝내 풀지 못한 그 마음을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밖에서 아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창가로 갔다. 당고모와 아들은 잡초가 우거진 꽃밭을 탐험하고 있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아들에게 말을 건넸고, 아들은 햇살이 뿌려진 꽃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고모님!”
그녀가 위를 올려다봤다.
“여기 있는 상자 가져가실 거예요?”
“상자?”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다 짐이니까.”
서늘한 가을바람이 가슴속까지 불어든다.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 내일 사람들이 와서 전부 내갈 거야.”
할 말을 잃은 나는 네, 하고 한숨 쉬듯 대답하고 돌아섰다.
“비행기! 비행기!” 아들이 소리쳤다.
책상 위에 놓아둔 아들의 비행기를 집어 들었다. “찾았다!”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현란한 에어쇼를 선보이자 아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위로 뻗는다. 아들을 향해 비행기를 날린다. 비행기는 아들의 머리 위로 떨어질 듯하다가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