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지나간 길목마다 흔적을 남긴다.
부러진 나뭇가지,
나뒹구는 플라타너스의 넓적하고 거대한 잎,
버려진 휴지조각..
겨울바람이 불어올 때면
얼어붙은 거리는 더욱 스산하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친 다음날,
이미 지나간 바람이지만
그 흔적은 분명히 남아있다.
하지만 바람이 잦아든 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따듯한 빛으로 반짝인다.
하루새 고요해진 공기로
어제의 세찬 바람을 그렇게 또, 잊는다.
바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흔적을 남긴다.
가볍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
마주 불어오는 마파람도 제 흔적을 남기고,
산등성이에서 골짜기로 불어오는 산바람도
꽃내음을 흩날리는 봄바람,
태풍을 몰고 오는 거센 바람도
지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지나고 나면
좋은 것도, 그렇지 못한 것도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흔적은 기억을 남긴다.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바래지만
그 시간 속에 풍화되고 정화되어
때론 아픔마저 그리운 것이 된다.
지나버린 인연들을 떠올린다.
때론 스쳐간 산들바람처럼
때론 몰아친 지난여름의 폭풍처럼
그렇게 지나가 지워져 가는 인연들이 생각나는 날이 있다.
되돌리고 싶은 인연이 그리운 날이 있다.
다시 생각해도 아픈 인연이든,
후회만 가득한 인연이든,
바랜 필름 속에 흐릿해진 모습들이 그리움이 되어 선명해지는 날이 있다.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조금 더 미안했노라
내가 조금 더 후회가 되노라
바람에 실어 보내고픈 날이 있다.
그 마음 또한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들이다.
폭풍 속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을 마음을
폭풍이 지난 자리에서 깨닫는 것이다.
겨울바람이 지나면 이름만으로 설레는 봄바람이 불어올 것이고, 봄바람이 지난 자리에는 여름의 태풍이 불어닥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그 자리에 남은 것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바람은 불어오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지날 것이며, 또다시 불어 들 것이다.
인연도 그러하다.
바람처럼 스쳐간 인연들이 바람 부는 날 문득 떠오르는 건, 아린 감정들이 시간에 실려 조금씩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머물지 않았기에 더 오래 남는 인연이 있다.
바람은 지나가지만, 지났기에 빛으로 남는 자리가 있다.
바람이 분다.
실려오는 것들과
흘러간 바람이 남긴 것들을
마음 깊이 담는다.
그리고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사랑만이 남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