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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부라이프 Mar 18. 2022

남편은 로맨티시스트

그는 길거리에 줄지어 심어놓은 예쁜 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꽃이 어여뻐서 좋단다. 일 년에 한 번 벚꽃이 필 때면 엉덩이가 들썩인다. 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면 그 한가운데 서서 ‘저거 봐라! 저기 봐라!’하고 감탄을 연발한다. 어린아이처럼 꽃구경에 웃음꽃이 핀다. 


겨울이 되면, 어릴 적 매서운 날의 추억을 아스라이 그리워한다. 흰 눈이 오면 순환버스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돈다. 쏟아지는 눈을 보며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손끝, 발끝은 시리고 볼때기는 벌겋게 상기되고 줄줄 흐르는 콧물을 손등으로 하도 닦아내 인중이 따갑던 그 시절.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전등 불빛은 반짝이고, 교회에는 색색의 트리 장식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했다. 라디오에서 연신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은 그저 즐겁고 행복했단다.   


‘남는 것은 사진이다’라는 말을 100% 믿는다. 어딜 가나 핸드폰을 먼저 들이댄다. 경치를 찍고, 가족을 찍고, 셀카를 찍는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 여행 갔던 곳의 추억, 가족의 행복한 모습. 언제 꺼 내봐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그에게 사진이란 추억이고 삶이다. 

맘에 드는 옷 하나를 사면 몇 년 동안 단벌 신사 당첨이다. 교복 같은 옷 하나를 고르는 데는 나름 까다롭다. 깔끔하고 단정한 흰색의 티, 활동하기 편한 진한 색의 등산바지, 군더더기 없는 감색 재킷, 심플하고 쿠션 좋은 흰 운동화. 그거면 다른 옷은 필요 없다. 


입맛은 다소 소박하다. 음식 솜씨가 겸손하셨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뭐든지 잘 먹게 됐다. 단지 너무 딱딱하고, 질긴 것만 아니면 된다. 나물과 계란 프라이 그리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양푼에 넣어 비벼주면 세상 행복한 한 끼가 된다. 아직 칼자루를 제대로 쥐어본 적 없지만, 나중 언젠가 가족들에게 멋들어진 음식을 해줄 생각이다. 


뇌졸중으로 한쪽이 마비되어 걷지 못하셨던 아버지를 모시고 에버랜드를 다녀왔던 효자 아들이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원 없이 잘해드려 그나마 후회가 덜하다는 아들. 이제는 어머니께 매일 전화해 안부를 묻고 시시콜콜한 말장난으로 웃겨드리는 아들이다. 


가족들과 함께 캠핑 가는 것이 꿈이라며 식구 수대로 침낭을 구입하고, 아내 몰래 캠핑 장비들을 수집했다. 그것들을 다 써볼 겨를도 없이 속절없는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은 커버렸다. 해외 발령이 나서 또 먼지만 쌓여간다. 하지만 아직도 캠핑카에 짐을 싣고, 아내와 함께 미국 횡단 여행을 하고 싶은 꿈을 꾼다. 


내 남편이다. 그의 인생은 어느 시절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할 만큼 추억으로 가득하다. 4살까지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사랑을 받은 아들, 누나들과 동네 사람 모두가 자기를 끔찍이도 아껴주셨다며 감사할 줄 아는 사람.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가족에게는 특히 헌신적인 가장. 가끔 현실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꿈을 꾸지만 또 그것을 이룰 것만 같아서 기대하게 만드는 남편이다. 교회 오빠로 만난 지 200일 만에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낳고 24년을 함께 살았다. 바지 뒤에 주름이 잡힐 만큼 빼빼 말랐던 허리는 제법 두툼해졌고, 풍성했던 머리는 빠지고 빠졌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렵하던 오빠는 안락의자에 누워 자기도 모르게 코를 고는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돈과 시간과 체력을 온전히 헌신했는데도 여전히 주말이면 ‘뭐하고 싶냐?’를 물어본다.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다!’를 주장하는 로맨티시스트. 이 만년 교회 오빠는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은데도 목석같은 아내에게 애정표현을 하고, 세계여행의 꿈을 꾸고, 똑같은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즐거워한다. 앞으로 살아갈 날 동안 남편의 얼굴에서 그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끊이지 않기를, 묵뚝뚝한 아내의 손을 계속 잡아주기를, 지금처럼 든든한 자리를 지켜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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