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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부라이프 Mar 24. 2022

그리운 아빠 이야기

당신을 너무 모릅니다.

중국을 오가던 한 보부상이 있었다. 그는 제법 장사 수완이 좋았다. 강화 나루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거래를 한 후, 집에 올 때는 꼭 자녀들의 비단옷을 사 왔다. 그는 대륙을 오가며 자식들을 공부시켜야 한다고 확신했다. 서울 사대문 안에 집을 사서 동생에게 관리를 맡겼다. 지금은 김포에 터를 잡고 있지만, 자녀들이 어느 정도 크면 그 집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아내와 네 자녀는 아버지가 오시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김포의 집성촌에서는 잔치가 열렸다. 그가 돌아오는 날이면 진귀한 중국 물건들과 비단옷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가족들은 남부럽지 않은 부유한 삶을 누렸고, 자녀들은 비단옷을 입었다.


어느 날, 큰 거래가 있다며 집을 나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금궤를 가득 싣고 나루를 건너는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소원대로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사대문 안에 있는 집은 아버지가 구입한 것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작은아버지 소유가 됐다. 그 집에서 학교 다닐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어느 날, 6.25 전쟁이 났다. 큰아들은 김포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걱정돼 한달음에 달려갔다. 동생들은 어찌어찌 살아있었으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이제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은 휴전했고, 하던 공부를 마저 하라는 친척 어르신의 권유에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서울 집도 황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작은아버지는 경찰이 되면 먹고 살 걱정 없다며 고등학교만 졸업하고도 시험을 치를 수 있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경찰들이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와 선글라스가 꽤 괜찮아 보였다. 친구들은 공부한 게 아깝다고 말렸지만 지긋지긋한 전쟁을 겪고 나니 사람답게, 폼나게 살고 싶어졌다. 경찰 시험을 치렀고, 합격했다.


경찰의 삶은 이도 저도 아닌 공무원의 삶이다. 몇 년에 한 번씩 전출이 되어 잦은 이사를 해야 했다. 직업을 가졌으니 결혼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성화에 선을 봤다. 꽤 다부지게 생긴 아가씨가 나왔다. 믿고 맡기면 살림을 잘할 것 같다. 인천에 신접살림을 차렸고, 공무원의 쥐꼬리만 한 월급을 가져다줬다. 줄줄이 자녀들이 태어났고, 6녀 1남을 둔 대가족이 됐다.


아버지 이야기이다. 아버지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다. 엄마가 이웃 어른들과 아빠 친구에게 건너 들은 걸 이야기해줬다. 엄마도 중간 생략된 이야기는 잘 모른다. 전쟁을 겪고, 힘든 날을 보내면서 아빠는 입을 닫았다고 했다. 엄마는 말없이 과묵한 모습이 남자다워 좋았단다. 말이 안 통해 답답한 결혼생활을 했지만. 딸들이 엄마와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면, 아빠는 안방 아랫목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듣는지 안 듣는지 모를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말 없는 아빠지만 손놀림은 끝내줬다. 아빠 손이 닿기만 하면 고장 난 선풍기는 다시 돌기 시작했고, 집안의 모든 전자기기는 새 생명을 찾았다. ‘정 가이버’였다. 어릴 적에 살던 이층 집은 아빠가 설계했는데, 딸들 부르러 다니기 힘들다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아빠는 안방에서 각 방으로 호출할 수 있는 벨을 달았다. 부엌에서 받을 수 있는 전화기도 달았고, 높이 달려있던 빨래건조대도 아내의 키 높이에 맞춰 낮게 조절했다. 세상 모든 남자들이 아빠처럼 그렇게 손재주가 좋은 줄 알았다. 아빠는 가족을 위해 그저 그렇게 묵묵히 할 일을 했다.


과묵한 아빠의 단어는 “으흠”, “그래”, “됐다” "뭘" 이 전부였다. 이 정도 말만으로 의사소통이 되는 게 신기할 정도다. 듣기만 할 뿐, 본인의 속내를 내보이신 적이 한 번도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옆에 있는 사람은 답답했지만, 정작 본인은 불편하지 않았다. 싹싹하고 발 빠른 엄마가 말 나오기도 전에 모든 준비와 필요를 채워줬다. 웅얼웅얼 대충 얼버무리는 소리도 엄마가 찰떡같이 알아들어 해결해주셨다. 허나 묵뚝뚝한 남편과의 불통이 답답했던 엄마는 딸들에게 온갖 푸념을 다 쏟아냈고, 딸들은 엄마의 신세 한탄을 받아내느라 아빠 인생을 궁금해할 틈이 없었다. 아빠는 멀리 있는 바위산 같았다. 


아빠의 장례식에 온 친구를 통해 학창 시절 얘기를 처음 들었다. “너희 아빠 때문에 내가 1등을 한 번도 못 해 봤다. 너희 아빠가 맨날 1등만 해서. 그깟 경찰 한 거 아깝지.” 꽤나 영특하셨나보다.


아빠가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경찰복을 입고, 오토바이에 앉아 있는 흑백 사진이 있다. 그 안에 담겨있는 아빠 인생의 깊이는 알지 못한다. 이제야 아빠 인생이 궁금해지다니 부끄럽고 죄송스럽다. 진작 몇 마디 말이라도 해주지. 아니다. 사진을 들고 가서 아빠한테 물어볼 걸 그랬다. 그걸 빌미로 아빠랑 긴 대화를 시도해볼 걸 그랬다. 하지만 아빠는 분명 이런 말을 입안에서 웅얼거리셨을꺼다.

"뭘, 됐어."


저 멀리서 언제나 있을것만 같았던 아빠는 10년전, 2011년 겨울에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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