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여행, 그리움만 쌓이네
여행, 그리움만 쌓이네.
“당신의 삶은 어떤 삶이었습니까?”
“내 삶의 반은 그리움이었네.”
내가 죽은 뒤 다른 세상에 들어갈 때 내 전 삶에 대해 묻는 다면 나는 위와 같이 대답할 것이다.
처음 영국에 도착하던 날 어쩌면 그때가 그리움의 시작이었다.
브리즈번 밤하늘의 별들
우리 모두는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생활을 하다가 향기, 사물 혹은 누군가의 행동에서 어느 순간 번쩍하고 떠오르는 아주 오래전 기억.
해질녘 집 옥상에 올라 가을바람을 눈을 감고 맞았을 때 필리핀세부 반타얀 섬에서 밀려오던 파도, 그때 그 이국적인 바다의 냄새가 떠오른 적이 있다.
기상학적으로 봐도 절대 그곳에서 불어온 바람이 아닐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가끔은 그리워 할 적도 있었지만 사실 기억에서 저만치 사라져간 기억 중 하나였다.
우리 집 옥상으로 불어오는 바람 냄새에서 어떻게 그때 그 순간에 맞았던 파도의 냄새와 닳아 있을 수 있는 걸까, 심지어 기억에서 잊혀 있었음에도 말이다.
정말 신기했다.
브리즈번으로 무작정 날아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 나는 아는 사람의 친구 집에 얹혀살기로 했다.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때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주소 하나만 들고 그 집을 찾아갔다.
브리즈번 중심지에서 한 참을 벗어난 시골 이었다. 심지어 숙박비도 내야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시내로 갈걸, 제길.’
나는 당장이라도 시내로 나가려고 했다. 시내는 그나마 발전되어있지만 그 이외의 지역은
집들 빼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숲이 많아 당장 악어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호주같이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는 생각보다 교통수단이 편리하지 않다. 자신의 차가 없으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우리는 불편하지만 그들에게는 여유일테다.
새소리 지저귀고 숲의 상쾌함이 느껴지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한 참을 기다리다 보면 버스가 우리 할머니의 걸음처럼 다가온다.
브리즈번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을 가다보면 점점 집들이 보이지 않고 산, 벌판, 호수만 나온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그 모든 것을 지나고 한적한 버스정류장에 내려 20분을 더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낮에도 오가는 사람은 그다지 없었다. 동네는 미국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런 조용하고 정돈된 마을이다.
그날은 그녀에게 대차게 차인 날이었다. 애원하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지만 그녀가 거절했다. 마침 뒤에 브리즈번 강이 흐르고 있어 그곳으로 뛰어 들어가 내 마음을 보여주려 했지만 강물이 너무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그럼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이런 거 싫어!”
그녀의 반응에 나는 무릎을 꿇자마자 용수철처럼 바로 일어났다.
‘그래 이런 거 싫어하지.’
한참을 애원했지만 그녀는 다시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했고 나는 그제야 알겠다고 수긍했다.
오후의 붉으스름한 해가 강물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별을 하기에는 날이 너무좋았고 풍경은 잔인하도록 고요하며 아름다웠다.
결국 나는 그녀를 보내기로 했다.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가 돌아서 가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 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강물이 여전히 반짝 반짝 빛나고 하늘은 너무도 푸르렀다.
주변에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누군가 만들어놓은 나를 위한 영화 세트 같았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한국이었다면 사람이 많아 하고픈 말도 하지 못했을 텐데 잠시나마 무릎이라도 꿇어보았으니 그래도 최선을 다한 거 아닌가.
잘가라.
그녀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녀가 다시 돌아올거라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뛰어와 내게 안기는 그림을 바랐던 걸까.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았나보다.
그렇게 나도 돌아섰고 뒤늦게 집으로 향했다.
버스가 도착하니 이미 해는 져 밤이었다. 살짝 무서워 졌다.
버스정류장을 벗어나자 정말 아무도 없는 정글을 걷는 기분이었다. 낮에는 정말 아름다웠던 산과 미니계곡 이었는데 밤이 되니 무서웠다.
종종걸음으로 걷자 다행히 마을이 바로 나타났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단번에 집을 찾을 줄 알았는데 비슷한 곳이었지만 계속 다른 집이 나왔다.
그곳이 그곳 같고 집들도 다 비슷했다.
밤 8시에 마을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불빛은 켜 있지만 마치 사람이 없는 듯 말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밤이 내는 소리 고요함에도 소리가 있는 것 같았다.
어디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아일랜드에서도 이런 적이 있었다. 심지어 버스가 집 바로 앞에 세워주는데도 한 시간을 헤맨 적이 있었다.
그때보다 상황은 더 심각해보였다. 밤이었고 물어볼 사람 하나 없었다.
급한 마음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지쳐 잠시 길가에 앉았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 시켰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순간 내 눈으로 수많은 별들이 쏟아졌다.
내 평생 그토록 많고 선명한 별들을 본 적이 없었다. 눈앞에서 별들이 춤을 추듯 반짝 반짝 빛났다.
신기했다.
별이 어떻게 저렇게 반짝 일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사실 별들은 이미 죽었거나 오래전에 존재하던 행성들이었을 것이다. 빛이 이곳 지구의 내 눈에 도달하기 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지나 왔을까.
나는 이미 사라진 별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죽으면 어딘가에 반사되어 우주의 다른 곳으로 빛을 보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우주 속 어느 행성 누군가가 아주 오랜 시간 뒤에 나의 빛을 보며 지금의 나처럼 잠시나마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누군가의 별빛을 바라보며 지금 이곳에 앉아 있다.
저 별빛 어딘가에 누군가 나와 같은 상상을 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잠시나마 그녀에게 버림 받았다는 사실을 잊었다.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일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집을 찾는 일도 모두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까만 밤하늘에 별들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그 순간만큼 나는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나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