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만남 그리고 사랑일지 모르는 감성들

#5 만남 그리고 사랑일지 모르는 감성들

by 박시원

만남 그리고 사랑일지 모르는 감성들


인간은 감성에 지배당하는 존재다. 사람들은 흔히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고 착각하곤 하는데 아니다. 결국 우리는 수많은 감성의 집합체이다.

순간순간 미묘하게 변하고 생기는 감성들이 우리를 삶의 중심으로 이끈다.

여행이 좋은 이유가 그 많은 섬세한 감성들이 평소에는 겨울잠을 자다가 낯선 곳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감성이 제일 도드라지게 나타날 때가 사랑이라는 것에 휩쓸릴 때다.

낯선 곳에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감성들의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멕시코시티에 도착하자 공기가 어딘가 모르게 무거웠다.

나중에 알아보니 멕시코시티는 해발 1500 미터에 위치에 있다고 한다.

난 왜 그런 기본적인 사실을 몰랐던 거지?

뉴스에 나오는 멕시코는 무서운 곳이다. 시장이 마피아에 사주해 자신을 비난한 대학생을 집단으로 납치해 죽인 사건은 이곳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일이 비일 비재한 곳이 바로 멕시코다.

하지만 그런 무서운 멕시코 역시 멕시코의 일부일 뿐이다. 나는 다른 부분을 찾아왔다.

그래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다. 택시 기사가 나를 어디다 팔아먹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손발에 땀이 날 정도였다.

우려와 다르게 친절한 택시기사는 나를 무사히 호스텔 앞 광장에 내려줬다.


축제 기간이라 수많은 인파와 각종 건축물들이 광장에 가득했다.

첫날은 고도 때문인지 아니면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인지 몸이 너무 안 좋았다. 기존 도미토리를 취소시키고 1인실에 묶기로 했다. 첫날이니까 내게 인심 썼다.

여행이란 아끼고 저렴한 곳을 찾아다니기도 하지만 내 몸을 혹사 시키면서 할 필요는 없다. 때론 내 몸을 아낄 줄 알아야한다.

짐을 바닥에 던져놓고 침대위에 몸을 뉘였다. 그대로 몸이 사라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낯선 도시에서의 불안감과 기대감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아 조그맣게 마련된 테라스로 나가봤다.

광장이 보였다. 광장에서는 레이저로 이리저리 합을 맞춰 보는 듯 각양각색의 색이 광장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화려한 불빛들을 보니 화려하지 않은 내 삶의 초라한 뒷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몸은 개운했다.

이 호스텔은 특이하게도 옥상에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다가온 독립기념일로 멕시코시티 여기저기는 축제 분위기로 들썩였다.

어딜 가나 사람은 넘쳐 났다.

하지만 난 이방인, 코레아에서 온 작은 아이일 뿐. 낯선 이들의 사이사이를 비집고 다니다보니 알게 된 사실 하나. 한국인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 무서운 곳이니까.'

한 블록 마다 소총을 메고 있는 경찰들, 위압감이 상당하다.

위험한 도시. 하지만 극도로 예민하고 불완전한 환경에 처해진 우주 속 보잘 것 없는 작은 행성에 사는 것보다 위험한 것이 있으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목숨의 지분 35%는 부모님의 것이기에 밤에는 특별히 조심하기로 했다.

멕시코시티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올랐다. 자, 멕시코의 그림을 보자.

모두 다 고만고만한 건물들 어느 것 하나 우뚝 솟은 것은 없었다. 내가 있는 이곳만이 유일하게 높다랗게 솟은 건물일 테다.

카푸치노가 담긴 나비 모양의 종이 잔을 들고 창가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담긴 세상, 그곳은 고요했다. 마치 멈춰 있는 듯 했다.

멈춰 버린 세상을 움직이려면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내가 그곳에 입장하는 순간 다시 세상은 미친 듯 돌아간다. 이곳을 내려가는 순간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곳에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느지막이 올라와서 그런지 처음부터 사람은 없었다. 누가 본다면 혼자 똥 폼 잡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나만의 영화에 빠져 있었다. 나는 내 인생을 찍고 있으니까.

움직이지 않는 세상에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어둠속에서 불빛들이 빛나기 시작할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세상으로 들어가야 할 순간이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내 몸을 살짝 건드렸다. 조심스런 손짓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한국인 같지만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내 카메라가 쥐어져 있었다.

아 차! 깜박했네.


“땡, 그라시아스”


무심결에 땡큐 할 뻔 했지만 현지어로 마무리 하고 고마움의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영롱하고 깊었다. 마치 눈 속에 푸르른 멕시코의 태평양을 담고 있는 듯 말이다.

“한국 분이시죠?”

“네. 네?”

나는 깜짝 놀랐다. 단 한마디에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 아, 그렇군요. 하고 돌아서야 나답지만 한 마디 더 하고 싶었다.


“여행 하시는 거예요?”


남자로 태어났으면 꼭 한번 헌팅을 해봐야 한다. 길거리에서 낯선 여자에게 접근하는 거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한 거다.

예전에 친구들과 장난삼아 혹은 술 한 잔하고 헌팅을 하겠다고 했지만 유독 나만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바로 나의 성격을 표현해 준다. 특히나 낯선 이에 대한 과도한 불편함.

그래서 ‘여행 하시는 거예요?’ 이 말을 하고 나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이 한 마디는 다른 열 마디가 필요 없다.

이 한마디로 누구하고나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직원 유니폼을 입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여행자 일 리가 없잖아 바보야.'

어쨋거나 대화는 시작했으니까.


그녀는 한국인이 맞지만 단 한 번도 한국을 가본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런가? 그녀가 계속 말을 시켰다. 가려고 돌아섰다가 몇 번이고 다시 이야기를 해야 했다.

"커피?"

"네?"

그녀가 달려가더니 커피 두 잔을 재빨리 가져왔다.

이미 다른 직원들이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커피를 내게 건넸다.

낯선 땅에서의 호의가 고마웠지만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커피를 홀짝 마셨다. 혹시나 약을 타지는 않았나 나의 몸상태를 체크 했다.

괜찮은 것 같았다.

그녀가 몹시 부끄러워하는 게 눈에 보였다.

외국에서 태어나 살았는데도 부끄러워하는 구나.

그녀와 창가에 앉았다.

멕시코 여자들이 멀리서 키득키득 거리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그리도 큰 구경인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녀는 한국말을 썩 잘하지는 않았다. 의사소통이 되는 수준이랄까.

외국에 사는 교포들이 하는 정도, 딱 그 수준 이다.

그동안 한국 여행자들 많이 보았지만 말을 시켜본 적은 없단다.

근데 왜 나한테 말 시켰냐고 물어보자,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그 뭐죠……. 아, 외롭다!"

"내가 외로워 보였다고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아무도 없는 곳에 한국인 남자가 혼자 있으니 용기 내 말시켜본 거라나.

그게 아니었다면 카메라는 영영 못 찾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한국인 친구도 없단다.

멕시코에 한국인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그렇게 됐다며 아쉬워했다.

낯설었다.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 내게는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한정적이다. 한국에서의 삶은 익숙하니까.

멕시코에서 살고 있는 그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그녀의 삶도 분명 평탄치 않았으리라.

내 이야기를 들을 때는 입술을 꼭 닫고,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이는데 귀여웠다.

그녀는 구릿빛피부에 큰 눈을 가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국인 어머니는 멕시코인 이었다.

혼혈이고 멕시코에 태어나 살고 있지만 전혀 외국인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녀도 나도 그녀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외국에 사는 교포들을 보고 반가워 말을 시키면 완벽히 외국인임을 느끼게 된다.

단지 외국어를 해서가 아니다. 보이지않는 마음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런 저런 이야기들 했다.

나중에 그녀가 친구들을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명이 쪼르르 달려왔다.

마치 내가 K-POP 스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류가 좋긴 좋구나.

그렇게 홀린 듯 시간이 흐르다보니 문득 겁이 났다.


‘멕시코에서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되는데…….’

‘혹시, 납치당하는 거 아닐까?’

‘이게다 계획된 범죄?’

‘이러다 목 잘리는 건 아니겠지.’


인터넷에서 무심결에 본 멕시코의 무서운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더 무서운 건 그런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점.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던 걸까. 그녀가 위험하니 숙소까지 데려다 주겠단다.

더 무서웠다.

'젠장, 이러다 진짜 잡혀 가는 거 아냐.'

하지만 순순히 끌려나와 그녀의 친구들을 호위를 받으며 거리를 걸었다.

웬걸, 멕시코 독립기념일 때문인지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래도 위험 하다고 그녀가 말했다. 사람 많은 거는 아무 상관없다고.


"나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러는 거죠? 하하."

이 개떡 같은 작업 멘트는 뭐지?

내가 말해놓고도 숨고 싶었다.

다짜고짜 무슨 말을 한거지 내가.

나의 헛소리에도 그녀는 너무나 환하게 웃어주었다.

미소가 정말 시원하고 아름다웠다. 근데 마음까지 예뻤다.

확실히 세상은 완전 불공평 하다.

우려도 잠시뿐, 그녀는 나를 무사히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내일 만나서 놀기로 했다. 그녀가 멕시코시티를 구경시켜 준다고 먼저 말을 꺼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녀가 내일 올까?

내가 여행하면서 가지게 된 편견하나는 라틴아메리카 쪽 친구들이 약속을 잘 안 지킨다는 것.

그래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아침에 숙소를 나오자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녀가 나타나서가 아니라 정말 너무 예뻐서(나도 남자다) 놀랐다.

이 친구를 한국으로 데려가서 연예인 시키고 싶은 거지같은 충동이 잠시 들었다.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여자가 되어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는 귀여운 학생 느낌에서 오늘은 성숙한 여자였다.

이러니 내가 납치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있겠는가.

이건 너무 뻔 한 거 아닌가? 아름다운 여자를 이용해서 남자들을 납치하는 거.

“납치 알아요? kidnap. 혹시 나, 납치하려고 하는 거 아니죠?”

다짜고짜 물었다. 겁도 나고 그렇다고 도망가기도 싫었다.

그녀의 표정과 눈빛을 확실히 감지했다. 이 건 진심이다. 납치? 절대 아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너무 순수한 눈빛이었다. 저 눈빛으로 나를 납치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의 순수한 눈망울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 내 자신이 싫었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녀의 이름은 그레이스, 나이는 23살의 어린 나이. 스스로 돈을 벌어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멕시코 국립 자치 (Universidad Nacional Autonoma de Mexico) 명문 대학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노벨 평화상, 문학상, 화학상등 세계적인 석학을 배출한 명문이라고 한다.

여행지를 다니다 보면 대부분 비슷한 루트로 다닌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늘 새로운 곳을 찾고자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새로운 곳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도움을 받을 수 도 없다.

현지인들은 그 어디보다 멋지고 아름답지만 유명하지 않은 장소를 알고 있다.

그녀와 함께 다니는 곳들은 내가 단 한 번도 여행책자에서 보지 못한 곳들이었다.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곳, 여행객이 없는 그런 곳은 늘 신비롭다.

물론 많은 시선을 받긴 하지만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의 대학에 가볼 수 있었다. 대학교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어 있는 만큼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특히나 중앙도서관은 모자이크 벽화로 덮여 있는데 세계최대 모자이크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일반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을 보는 듯 했다.

등록금도 엄청 싸다고 하니 부럽기도 하고 욕심도 났다.

버스에 앉아 옆에 앉은 그녀의 눈을 보며 이야기하다보면 빨려 들어갈 것 같아 어지럽다.


땀이 흘러 끈적끈적한 나의 오른쪽 팔이 버스 운전사의 화려한 운전솜씨에 그녀의 팔에 쉴 새 없이 닿는다. 너무나 맑고 화창한 날씨 때문인지 그녀 팔의 솜털까지도 선명히 보였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 멕시코 날씨에도 우리는 꽤나 즐거웠다.

그녀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좋았고 나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것도 괜찮았다.

한국에서 누가 '요즘 어때?' '여자 친구랑은 어떻게 됐어?' 이런 질문들을 하면 굉장히 짜증나는데 오히려 내가 그런 이야기들을 먼저 들려주었다.


"저스틴,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했구나. 사랑했다면 물론 그럴 수 있는 거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증거니까. 하지만 너의 모든 시간은 그녀를 잊는데 쓰지는 말 아죠. "


말하는 것을 보면 22살인 그녀가 나보다 더 인생을 오래 산 것 같은 철학을 지녔다.

차분하고 진지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그녀의 아버지는 5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눈에 선했다.

내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를 조금씩 알게 되고 우리는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내 비밀을 하나쯤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

멕시코의 케밥은 정말 맛있다.

그리고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 밑에 앉아 마시는 병콜라는 두말하면 입 아프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코카콜라!

밤늦도록 이곳저곳을 다니고 먹고 마시고 ,나 답지 않은 완벽한 하루였다.

그레이스는 다시 나를 데려다 주었고 내일 자기네 집에 초대하겠다고 하더니 이내 농담이라며 씩 웃었다.

나는 줄곧 그녀 에게 내가 왜 지후아타네호로 가야하는지를 설명했다.

그녀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내 마음을 보고 있는 듯 했다.

사실, 그날 저녁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내 마음은 그냥 이곳에서 가는 날까지 있는 것이었다. 정말 몹시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나는 떠나야 한다. 며칠 동안 여기 있는 다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결국에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이가 아니던가. 더 이상 마음을 주지 말자고 다짐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아침은 왔다.

남김없이 모든 것을 가방에 넣어 하나로 만들었다. 여행은 늘 그렇다. 가방 하나와 나 뿐이다. 가방을 메고 내가 누웠던 침대를 바라봤다. 뒤에 남기는 것은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가방에 있는 물건 보다 훨씬 많은 것이 남겨져 있다.

항상 이렇게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고 나설 때 마음은 묘하다.

그리움은 남겨두고 기억만 가져간다.

어제 약속대로 그레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치가 아니면 나에게 잘해줄 이유가 없었는데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와 벤치에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완전히 미친 거다.

지키지 못할 약속하는 남자가 제일 재수 없는데 내가 그러고 있었다.

병신!

열쇠고리와 내게 쪽지를 내밀었다.

아, 여자에게 편지를 받아본 게 언제였던가.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났다.

그리고 내게 가면서 먹으라며 음식을 주었는데 나는 그때 갑자기 울컥하고 말았다.


어릴 적 아빠가 큰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했고 엄마는 간호를 해야 했다. 나는 누나와 충청도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잠시 살았는데 그때는 시골이었고 버스조차 제대로 다니지 않을 때였다.

그곳에서 몇 달을 지냈다. 아버지가 퇴원하고 우리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기차역까지 할아버지가 자전거로 데려다 주었던 적이 있다.

기차역까지 같이 못가는 할머니는 내 가방에 계란이랑 과자랑 잔뜩 넣어주셨다.

아가, 잘가 라고 눈물을 훔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아른거린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몇 달간 뛰어 놀았던 골목길이 자전거 뒤로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계속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할어버지 등 뒤에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 때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오른다. 이유를 잘 모르겠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할아버지는 일 년 전 돌아가셨고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나는 그냥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아련해진다.

그녀에게서 나의 어린 시절에 느꼈던 그 기분을 다시 느꼈다. 특히나 시골을 다니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이제 어른이 되었는데 왜 슬플까.

그냥 어릴 때 생각이 많이 났던 거 같다.


오빠를 처음 본 순간 태어나서 한 번도 못 느껴본 감정을 갖게 되었어. 고맙고, 즐거웠어.

나이도 많은데 아직도 인생, 삶, 특히나 오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잖아.

혼란스럽다는 거, 그건 자연스러운 거고 당연한거야.

지금 오빠는 자신을 찾아가는 중일 테니까.

언제까지나 오빠를 응원할게.

우린 언제나 친구인거 알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오빠를 기억하고 있을 거야.

멕시코의 태평양처럼 따스한 미소만 가득하길…….


내가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 후에도 가끔씩 꿈을 꾸었는데 일어나고 나면 내가 영화를 본 후 내 이야기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 할 때도 있다.

내 인생에서 앞으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인생에서 단 한번 일어날까 말까한 일이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도 나를 좋아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서로의 마음을 묻어둔 채 안녕을 고했다.


여행 중 만나는 다른 이들처럼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 싫어 그녀의 연락처조차도 받아오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이불을 발로 차며 수없이도 더 후회 했던 일이다.

하지만 연락처를 받았다고 한 들 무엇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물론 멕시코로 날아간다면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남겨둘 것은 남겨 둬야 한다. 그렇게 또 하나의 기억이 그곳에 있다.


여행은 이동이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다.

계속 이동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곳에 잠시 머문다.

새로움에 기대가 되기도 하지만 익숙해져버린 순간을 버리기 싫어 아쉬울 때도 많다.

하지만 다시 배낭을 메고 떠난다.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나의 삶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나와 앞으로의 나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늘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여행 내내 나를 따라다닌다.

여행 중 늘 생각하고 고민한다. 내가 가는 길이 과연 맞는 길인지, 아니면 잘못된 길인지.

하지만 잘못된 길로 왔다고 해도 여행을 실패한 것은 아니다.

여행 후 어떤 성적표나 결과지를 받는 게 아니다. 나의 만족감을 위한 일도 아니다.

내 안에 빈공간이 있고 여행을 통해 그걸 조금씩 채우는 거다.

하지만 늘 그것을 모두 메우며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다만 인생을 좀 더 알아가고 삶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여행이 좋다.


내 삶의 나는 늘 한곳에 있고 떠나는 나는 완벽히 낯선 사람과도 같다.

출발 할 때는 낯선 사람과 떠나지만 돌아올 때는 낯선 이는 없다.

떠나고 나면 비로소 지금의 내가 더 자세히 보인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나는 떠나면 비로소 내가 보였다.

지금 까지 수없이 비행기를 올랐고 여행을 했지만 문득 내가 처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던 그 날, 미칠 듯 몰려오는 긴장감으로 한 숨도 이루지 못했던 내가 그리울 때도 있다.

서툴고 아무것도 몰랐을 때가 그립다.

남들처럼 똑 부러지게 길을 잘 찾는 것도 계획을 잘 세우는 꼼꼼한 스타일도 아니다. 나는 매번 길을 잃어 발에 물집이 잡히기도 하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어깨가 부서질 거 같이 아플 때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가’ 란 원초적인 질문을 받는다.

언제나 결론은 없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지금은 그냥 걷자, 그리고 여행을 하자.’

어느날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여행? 삶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맞는 말이다. 이게 뭐 그렇게 의미가 있겠어. 내 돈을 써가면서 사서 고생하는 게.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의미 없지. 근데 말이야. 삶은 원래 의미 없는 짓을 하며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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