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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원 Nov 30. 2016

노을에 중독되다.


나는 노을에 중독되었다.

멕시코 어느 시골 마을에서 버스 터미널에 앉아 있던 순간, 그 순간에도 노을은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움의 주체를 찾아서 내게 끌려온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80년대를 연상시키는 날것의 회색빛 벽돌을 서투른 듯 무심하게 쌓아 올린 건물 뒤 소낙비에 젖은 도로를 달리는 오래된 차들 그리고 어디선가 날아든 새들이 젖은 물기를 털어내며 건물 모퉁이에 잠시 앉아 있다 노을을 향해 힘 찬 날갯짓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노을이 파란 하늘에 물들 때 나는 늘 꿈꾼다. 노을처럼 아름다운 날이 올 거라고…….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현실의 대답.

노을의 아름다움은 슬프다.


 나는 시골에 산다. 우리 집 주변은 죄다 논이라서 그런지 옥상에 올라서면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나는 늘 옥상에 올라 하늘을 바라본다.

낮도 밤도 아닌 하루 중 가장 짧게 나타나는 노을은 언젠가부터 내 마음속에서 깊은 감수성을 불러일으켰다.

노을이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 드넓게 펼쳐진 논들 사이 바둑판처럼 생긴 농로길을 따라 감정에 취해 홀로 걷는다.

나의 세상에는 논, 가로등 그리고 노을만이 있다.

봄의 노을 여름의 노을 가을의 노을 그리고 겨울의 노을이 온다.

눈이 하얗게 쌓은 길 위에 차도 사람의 흔적도 없다.

노을의 붉은빛은 그 주변을 붉은 보라색으로 물들인다.

노을빛이 눈 위로 비추면 나는 그 길을 걷는다.


입에서 뿜어져 나온 입김이 공기 중으로 퍼지면 노을은 어느새 산 뒤로 넘어가 사라진다. 마치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멀리 말이다.

시퍼렇게 변한 겨울의 추위가 눈 위로 차갑게 떨어지면 나는 연관되지 않는 곳의 순간이 떠오른다.

멕시코의 시골 해변에 앉아 노을이 떨어지길 기다리던 순간 말이다.

산과 바다 사이로 사라지던 연분홍빛 노을, 그 노을을 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현실 속에서 사라진 그녀를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하룻밤의 꿈처럼 사라져 가는 젊은 날을 아쉬워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 나는 아마도 이 순간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눈과 겨울의 추위가 길을 덮고 그 위를 걷고 있는 바로 이 순간 말이다.

어떤 시간의 내가 현재의 나일까.

나는 노을에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을 볼 때면 이미 현재란 벽은 무너 져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 있었고 나는 이곳에 있다. 그리고 노을은 늘 저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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