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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Jul 07. 2022

궁상의 끝자락에서...

지난주 토요일 예약도서가 도착했다는 도서관 문자를 받았다. 레이첼 보츠먼의 <신뢰 이동 : 관계 제도 플랫폼을 넘어, 누구를 믿을 것인가>을 예약했더랬다. 담당 업무 관련해 사회적 자본 축적과 제고 방안에 대해 고민 중이라 빌리게 됐다. 대출기한은 어제까지. 마침 지난주에 빌린 10권의 책을 반납하고 새 책도 빌릴 겸 남편에게 라이드를 부탁해 퇴근 후 도서관으로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공간 중 하나는 도서관이다. 회사와 집 사이에 자리한 국립도서관은 한동안 나의 퇴근행과 주말행을 책임졌는데, 몇 년 전 안전진단 결과가 좋지 않은 뒤로 계속 보수공사 중이다. 대안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다른 도서관에도 발도장을 찍어봤지만 탐탁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우연치 않게 새로 생긴 시립도서관을 방문하게 됐고 그 뒤로 이 도서관과 사랑에 푹 빠졌다.




장서 보유량도 만족스러웠고, 무엇보다도 쾌적하고 세련된 공간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었다. 갈 때마다 내 품격마저 높아지는 기분이다. 1층부터 5층까지 차분히 모든 장소를 경험해보고 싶지만 늘 시간에 쫓겨 방문하는지라 한 시간도 채 머물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예약도서가 있는 3층으로 향해 빌리고 싶은 책을 고르는데 선택이 쉽지 않다. 이 책도 빌리고 싶고, 저 책도 읽고 싶고.


간신히 10권을 품에 안고 도서관을 나섰다. 오랜만에 남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육아휴직 1년을 마치고 며칠 전에 복직을 했기에, 근황을 나누고자 연락을 한 거다. 남편이 운전해주는 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차량 이야기도 하게 됐다. 사실 남편이 모는 우리 집 유일한 차는 동생이 몇 년 전에 준 거다. 동생은 새 차를 구입하면서 연식이 오래된 헌 차를 버릴 참이었는데 상태가 아주 나빠 보이지는 않아 내 차지가 된 거다.




동생과 이야기꽃을 피우다 정신을 차려보니 집이 아닌 낯선 곳에 도착해있다. 집 냉동고가 비어 있어 남편이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온 거다. 잠깐 깜빡이를 켜고 남편은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가고 난 차 안에서 동생과 통화를 이어갔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기다리니 드디어 남편이 돌아왔다. 그런데 차 상태가 영 시원찮다. 20분 가까이 시동을 켜봤지만 결국 실패하고 슬슬 짜증이 난 우리 부부는 평범한 여느 부부들처럼 서로를 탓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하루 종일 있는 남편은 그 긴 시간 동안 무얼 하고 왜 굳이 이 시간에 피곤한 날 이끌고 아이스크림 할인점까지 와야 했는가? 보험회사에 전화해 해결하면 될 것을 왜 계속 혼자 머리 끙끙 싸매면서 고민하고 있는가? 어차피 시동 안 켜지는 차라면 일단 두고 집에 가야 할 텐데 왜 짜증만 내면서 말도 못 꺼내게 하는 걸까?




지금 차를 폐차하고 새 차를 사자는 내 말에 화를 버럭 낸다. 화내는 남편에게 화가 난 나도 일단 차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집까지 갈려니 막막하다. 택시를 잡는 게 어렵디 어려운 동네. 버스 배차 간격도 기본 20~30분이다. 한참을 기다리고도 버스에서 내려 꽤 걸어야 하니 그냥 걸어서 가는 게 속 편하다.


걸어가겠노라고 마음은 먹었는데 선뜻 내키지 않는다. 책 10권이 들어 있는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싶지 않다. 슬슬 녹기 시작하는 수만 원어치 아이스크림이 들어있는 까만 봉지 2개를 드는 것도 마뜩지 않다. 차로 오갈 거라 별 신경 쓰지 않고 회사에 입고간 원피스를 갈아 입지도 않고 샌들 차림이었는데 이 불편한 차림으로 걸어서 집까지 가려니 한숨부터 나온다.




실랑이 끝에 남편이 가방을 메고 아이스크림 봉지까지 들고 차 밖으로 나섰다. 날씨는 덥고, 남편은 짐이 무겁고, 나는 발이 불편한 상태로 말없이 걷기만 했다. 오는 길에 불안 불안하던 내 샌들은 아예 밑창이 떨어져 버렸다. 착용감이 편해서 수차례 본드를 붙여가며 몇 차례 여름을 함께 했는데 하필 이 날 유명을 달리하다니.


왼발은 5cm 남짓 굽이 있는데 오른발은 플랫슈즈가 되어버리니 의도치 않게 절뚝거리며 걷게 된다. 빨리 걸을 수 없어 계속 뒤처진다. 40여분 대장정을 끝내고 나니 기진맥진 상태다. 그래도 집까지 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화는 다 풀렸다. 무거운 짐 메며 끙끙대고, 움직이지 않는 차 손본다며 목장갑 끼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고생한 남편에 대해 안쓰런 맘이 펑펑 샘솟는다.




어젯밤 고난의 행군 덕분에 아침에 재보니 체중이 꽤 줄었다. 남편은 일찌감치 차를 정리하러 나간다. 조금 후에 보험회사에서 견인 안내 문자가 날아왔다. 또 조금 있으니 배터리 교체비를 입금해달라는 남편 문자가 왔다.


어젯밤에는 새 차를 사겠노라고 다부진 결심을 했었는데 마음이 흔들린다. 새 배터리로 바꿨으니 이제 한참 동안 잘 운행되겠지? 아무래도 새 차는 다음에 살까 싶다. 이런 내 삶은 절약의 표본일까, 궁상의 극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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