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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Jun 18. 2021

소심 대마왕의 어느 하루

눈 뜨자마자 향한 곳은 아파트 단지 안 독서실이다. 일본어 시험이 고작 보름 남짓 남았는데, 공부해야 할 분량은 끝이 안 보인다. 절반만 맞추면 능력시험 통과가 가능하지만, 그 절반도 쉽지 않다. 청해는 과락도 걱정된다. 공부만 해도 쉽지 않을 마당에 매일 밤 자기 전 웹툰 감상은 빠뜨릴 수 없는지라 늘 시간이 부족하다. 모처럼 새벽에 일어나자 고민하지 않고 바로 독서실로 향한 이유다.


아무도 없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나 혼자 부지런히 사는 것 같아 으쓱해진다. 30여분쯤 지나니 밖이 소란스럽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청소하시는 분들이 내가 있는 열람실로 들어와 불평을 하신다. "아니, 왜 불을 켜 두고 간 거야. 밤새 불을 켜 뒀나 보네."



내 자리는 후미진 곳이기는 하지만 입구에서 바로 보인다. 나를 보지 못할 리가 없는데. 목을 가다듬어 보기도 하고, 불필요한 의자 소리를 내면서 잔뜩 존재감을 냈는데도 아주머니들의 불평이 잦아들지 않는다. 조금 후에는 아예 불을 다 꺼버리셨다.


견디다 못해 "사람이 있어요."라고 했지만 돌아온 건 "혼자 있는데, 왜 불을 다 켜 두고 있어?"라는 핀잔이었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서러웠다. 내 주변에만 형광등이 남도록 이것저것 버튼을 누르신다. 덩달아 내 자리에도 어둠이 깔린다. 아주머니들은 만족스러울 만큼 최소한의 불빛을 남겨두고 유유히 사라지셨고, 나는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을 가득 안은 채 꾸역꾸역 출근 전 공부를 이어갔다.




모처럼 나만의 점심시간을 맞았다. 요즘에는 출장도 꽤 있고, 지인들과 점심 약속도 종종 있어서 내가 홀로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 나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 생기면 미리부터 머릿속이 바빠진다. 오늘 나의 픽은 3일 연속 건너뛴 운동과 조우다. 지난주까지는 플랭크를 5분까지 했는데, 이 기세를 이어나가고 싶다.


다행히 피트니스 센터가 비어 있다. 새벽에 만난 여사님들의 핀잔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환한 가운데 운동하고 싶었던 나는 그냥 불을 다 켰다. 신나는 발걸음으로 플랭크를 하기 위해 매트리스 쪽으로 향했다. 아, 누군가 이미 운동을 하고 있다. 아니다. 자세히 보니 그냥 누워서 아예 주무시고 계신다. 그래서 불을 다 꺼뒀었구나.


운동하라는 공간에서 오수를 즐기는 분, 평범치는 않다. 하지만, 이 분의 단잠을 깨울 만큼 무례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조용히 플랭크를 포기하고 레그 프레스와 데드리프트로 만족하기로 했다. 레그 프레스를 하며 다리를 이완할 때마다 무게감 있는 추들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소리 내며 운동하는 게 잘못은 아닌데, 점심 운동을 끝낼 때까지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또 시작됐다. 독서실 안에서 시끄러운 정체불명의 아이들. 벌써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십 원짜리 욕도 간간이 들린다. 소란 피우는 아이들을 훈육하지 못하는 나는 자격미달 어른일까? 그저 무한질주 10대들의 후환이 두려운 비겁한 어른에 불과한 것일까?


따끔한 한마디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거듭하다 드디어 용기를 냈다. 일단 시작하는 게 어렵지, 막상 꾸짖다 보니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거의 간곡한 부탁이었던 것 같다. "학생들, 좀 조용히 해줄래요?"


우락부락 예의 없는 아이들을 상상했는데, 막상 떠드는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보니 험한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자리로 돌아오니 앞자리에 앉은 분이 유독 조심하는 게 느껴진다. 덩달아 나도 숨도 크게 못 쉬겠다. 조금만 더 참을걸, 괜히 말했나? 뒤늦은 후회감이 밀려든다.


개복치 수준 소심 대마왕으로 보내는 하루는 참 길고 마음이 힘겹다. 얼마 전 만나 뵌 정신건강 전문의 선생님께선 우리 마음이 왜 이런지 이해하기 위한 '마음지도'가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마음지도가 있으면 좀 덜 힘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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