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서치 힐데 Jul 05. 2021

기시감과 미시감 가운데

그런 만남이 있다. 익숙한 듯 하지만, 어딘가 낯선 이와 스쳐 지나가는 순간. 최근에 두 번 경험했고,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다.


평소에 화려하게 꾸민 모습이 익숙한 여배우들의 소탈한 모습에 열광하곤 한다. 가식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에 호감도 지수가 높아진다. 다른 세상 속 주인공처럼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도, 사실은 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순간을 거칠 때도 있다는 점에 거리감이 좁혀지는 듯하다.


일상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늘 똑같은 홈웨어를 입고 나오는 분이 계셨다. 집에서 늘 늘어진 헌 옷만 입는 내 모습이 오버랩됐다. 아이들에게 핀잔 듣던 내 입성이 살짝 당당하게 여겨졌다. 내 생각이 미처 미치지 못한 지점이 있었다. 나는 여배우가 아닌 걸...


엘리베이터 타니 청량한 아침인사가 나를 반긴다, 평소에 같은 라인 이웃님들께 조용히 목례만 나누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소리 내서 인사하는 이웃님께는 함께 소리 내서 인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인사하고 이웃님 뒤편에 섰는데 모골이 송연해진다.


기시감과 미시감이 한데 섞인 감정이 순식간에 나를 감싼다. 몇 초의 정적 후, 엘리베이터는 내가 예상했던 그 층에 멈췄다. 함께 탔던 분은 같은 회사 동료분이셨다. 난 긴가민가하는 느낌으로 뒷모습을 주시했고 그분은 내 변신 전(?) 모습에 나를 미처 못 알아보신 듯하다. 아님 알았는데도 내가 당황할까 봐 배려해 주신 것일 수도.


당시 내 모습은 내가 즐겨보던 리얼리티 쇼에 등장하는 험블함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새벽 5시에 눈뜨자마자 독서실 행을 해서, 2시간 넘게 공부하고 아파트 단지 피트니스까지 들려 가벼운 운동까지 마친 즈음이었다.


앞머리 하나도 없이 질끈 묶은 머리에, 땀냄새가 밴 옷. 1만 원짜리 무릎 튀어나온 몸빼에 가까운 고무줄 바지에 아들이 버리려고 내다 둔 검정 티. 아쿠아슈즈로 화룡정점 패션을 완성했더랬다. 누굴 만나도 꽤나 민망했을 듯한 외관으로 직장 동료분과 같은 공간에서 부딪히다니...


아무리 동네라지만, 현관문 밖을 나설 때는 좀 제대로 갖춰 입어야 하나 고민했다. 일주일 후, 고민은 고민으로만 끝냈다. 새벽에 눈뜨자마자 바로 향한 곳은 단지 내 독서실. 모처럼 갖게 된 하루 휴가를 독서실에서 보낼 계획이다. 여전히 내 평상복에는 변함이 없다. 역시나 편한 고무줄 바지. 하루 종일 공부해야 하는데 이 바지만큼 활동성이 높은 게 없다. 이번에 티셔츠는 바꿨다. 목과 밑단이 늘어난 보라 줄무늬 티셔츠로.


신은 조금 고민했다. 샌들과 운동화, 아쿠아슈즈 중에서. 독서실에 오는 학생들이 에어컨을 틀면 발이 시러우니 샌들은 패스. 몇 시간씩 앉아있어야 하는데 통기성 떨어지는 운동화도 패스. 역시 이번의 선택도 적당한 볼륨과 적당한 온기와 적당한 탄력성을 보유한 아쿠아 슈즈다.


두어 시간 공부하다 7시가 좀 넘어 커피숍으로 향했다. 출근시간대가 되면 사람들이 많아져 민망할 테니, 한산할 때 미리 오늘치 커피를 사둘 셈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는데 다시금 기시감과 미시감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느낌이 날 찾아들었다.


저만치 한 남자분이 걸어가고 있었다. 아침 일찍 출근을 하시는 군. 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직종에 종사하시나 보다. 이 여름에 긴팔 정장이라니. 그런데 커피숍에 가보니 아까 그 정장의 주인공이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보처럼 그 줄에 가서 줄을 서려고 하다가 주문대에서 나를 부르는 직원 분의 안내를 따라 정신을 차렸다.


시력이 나쁜 데다 얼굴을 잘 인식하지 못해 사람을 좀처럼 못 알아본다. 눈이 잘 안 보이니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선 유독 더 헤매게 된다. 버벅대며 주문을 하고 있는데, 긴 상의 쟈켓을 차려입은 그분이 내 뒤에 서서 말을 걸었다.


사장님 수행비서관님이셨다. 사장님, 부사장님 관사가 나와 같은 단지라는 게 그제야 떠올랐다. 전날 관사에서 주무시고 아침 일찍 지방 출장을 떠나려던 참에 모닝커피를 사러 들르신 것이다.


나의 기시감은 왜 두 번이나 틀리지 않았을까?기시감을 억지로 외면하고 미시감으로 둔갑해버린 내 의식의 저편엔 어떤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일까?


시험이 끝나 오늘 아침엔 독서실을 스킵하고 피트니스센터만 다녀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정신 차리고 살펴보니 늘 입던 그 옷, 그 신발이다. 2~3초 고민하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택했다.


1분 16초. 편한 복장을 포기하는 대신에 편한 이동수단을 포기하기로 했다. 하루에 이만큼 계단을 이용하면 출근 전 불상사는 방지할 수 있다. 아..방지할 수 있는 거겠지?

작가의 이전글 꾸역꾸역 쓰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