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항상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노학난성)하니 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이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사셨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로 알려진 러시아 과학자 류비셰프처럼 내가 21세기형 시간 정복자를 꿈꿨던 건 다 아빠 덕이다.
아버지는 조그만 일에도 큰 호기심을 보이셨다. 조금이라도 궁금한 것들은 사전을 찾곤 하셨다. 친정에는 영어사전, 국어사전, 한영사전, 옥편이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었다. 사전 찾기에 이골이 났음에도 아버지가 매주 갖다 주시는 십자말 풀이를 하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나도 사전부터 뒤적이곤 했다.
아버지는 심각하게 살기보다 즐겁게 살 것을 강조하셨다. 아버지 행복의 원천은 크게 두 갈래였다. 종교 관련 방송사가 송출하는 새벽설교 프로그램과 노래다.
아버지는 무신론자셨지만 불교, 기독교에 모두 관심이 많으셨다. 덕분에 어렸을 때는 목탁소리와 함께 아침을 열곤 했었다. 성경공부를 독학으로 하신 적이 있었던 아버지는 교회 목사님, 성당 신부님의 말씀도 자주 청취하셨다. 물론 텔레비전을 통해.
노래에 대한 아버지 사랑 역시 못 말리는 수준이다. 친정에서 아이들을 돌볼 때, TV 주도권을 놓고 누나와 다투는 아들내미에게 거실에 가서 보라고 달랬더니 아들이 대꾸했다.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은 고장 났어.
하루 종일 노래밖에 안 나와!
평소 지론과 다르게 촘촘하게 시간 관리하며 손자를 돌보기보다 아이들 앞에서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틀어놓으며 방치하는 아버지가 살짝 야속하기도 했다.
지금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 알겠다. 부모가 강요한다고 아이가 갑자기 모범생이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깨달으셨나 보다. 어차피 남의 인생은 못 바꾸니 자신의 인생이라도 즐겨보겠노라고.
아버지는 내 삶의 열렬한 응원군이시다. 내가 인생 마디마디에서 소중한 결실을 거둘 때마다 가장 크게 기뻐해 주셨던 분이다. 내가 힘들어할 때면, 내 인생은 잘 풀리게 되어 있으니 큰 걱정 하지 말라며 절대 신뢰를 보내시곤 했다. 가진 것에 감사하라는 말씀도 자주 하셨다.
내가 잘 될 거라며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아버지를 떠올리니, 읽었던 책 제목도 기억 못 하는 나 자신이 처량해진다. 이대로 괜찮은 건가 싶어서 이번 주 영어 스터디 주제를 알츠하이머로 선정했다. 주제 선정 배경과 후보 질문들까지 다 정리했는데 뭔가 석연치 않다.
블로그에 기록해둔 예전 스터디 영어 주제를 뒤져보니, 더 슬퍼진다. 이미 작년 9월에 다뤘던 주제다. 놀랍게도 그때 내가 정리해둔 질문과 지금 질문이 대동소이하다. 아무래도 알츠하이머가 시작된 듯싶다. 치매에 좋다는 음식 좀 찾아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