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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Oct 06. 2021

오직 두 사람

옆자리 동료분이 김영하 작가님 책 두 권을 빌려줬다. 김영하 작가님 책은 에세이만 읽고 소설은 읽어본 적 없다는 내 말에 소설책만 두 권을 건넸다. 3일 연휴를 앞두고 <오직 두 사람>과 <살인자의 기억법>을 받았다.


소설을 그리 즐기진 않는다. 한 달에 읽는 약 서른 권 책 중 소설은 보통 5권 이내다. 에세이와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읽기에 자주 찾진 않게 된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즐겁게 읽은 후 다음 책을 폈다.




이상하게 <오직 두 사람>은 책을 건네받은 순간부터 낯익은 느낌이 농후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제목이 낯익은가 보다. 하지만,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왠지 서늘한 느낌이 든다.


혹시나 싶어 블로그를 뒤적여보니 이미 읽었던 책이다. 오래되지도 않았다. 불과 작년 5월에 읽었으니 16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셈이다. 그새 책을 읽었는지조차도 잊어버리다니. 다행인 건지 책 안에 수록된 단편들은 조금 읽어나가다 보니 내용이 어슴푸레하게 기억이 났다.


그럼에도 서글펐다. 김영하 작가님의 소설을 또 읽은 건 아닌지 블로그에 기록해둔 독서목록을 뒤졌다가 절망했다. 4년 전에는 <퀴즈쇼>란 책도 읽었다. 책 내용은 물론, 전혀 기억에 없다. 다독 습관을 바꿔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이 된다.




<오직 두 사람>은 친하다고 하기에는 정도가 심한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담은 작품이다. 아버지의 딸에 대한 집착, 아버지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딸의 모습이 담긴 단편이었다.


부녀관계를 다룬 책을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정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역주행의 아이콘다운 분이다. 온갖 문명의 이기와는 고강도 거리두기를 하며 지내고 계신다. 그 흔한 현금카드, 핸드폰을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으시다.


병원도 거의 안 가신다. 늙으면 장기 기능이 쇠퇴하는 건 자연스러운 섭리인데 그것을 억지로 바꿔 특정 장기만 기능을 강화하는 건 오히려 부작용만 초래한다는 게 지론이시다.


치과에 가시라고 말씀드렸다가 어차피 위장기능도 약화됐는데 이만 튼튼해져서 식탐을 부리면 몸에 탈이 난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궤변 같은데 설득당했다.




아버지는 항상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노학난성)하니 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이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사셨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로 알려진 러시아 과학자 류비셰프처럼 내가 21세기형 시간 정복자를 꿈꿨던 건 다 아빠 덕이다.


아버지는 조그만 일에도 큰 호기심을 보이셨다. 조금이라도 궁금한 것들은 사전을 찾곤 하셨다. 친정에는 영어사전, 국어사전, 한영사전, 옥편이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었다. 사전 찾기에 이골이 났음에도 아버지가 매주 갖다 주시는 십자말 풀이를 하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나도 사전부터 뒤적이곤 했다.




아버지는 심각하게 살기보다 즐겁게 살 것을 강조하셨다. 아버지 행복의 원천은 크게 두 갈래였다. 종교 관련 방송사가 송출하는 새벽설교 프로그램과 노래다.


아버지는 무신론자셨지만 불교, 기독교에 모두 관심이 많으셨다. 덕분에 어렸을 때는 목탁소리와 함께 아침을 열곤 했었다. 성경공부를 독학으로 하신 적이 있었던 아버지는 교회 목사님, 성당 신부님의 말씀도 자주 청취하셨다. 물론 텔레비전을 통해.  


노래에 대한 아버지 사랑 역시 못 말리는 수준이다. 친정에서 아이들을 돌볼 때, TV 주도권을 놓고 누나와 다투는 아들내미에게 거실에 가서 보라고 달랬더니 아들이 대꾸했다.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은 고장 났어.

하루 종일 노래밖에 안 나와!


평소 지론과 다르게 촘촘하게 시간 관리하며 손자를 돌보기보다 아이들 앞에서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틀어놓으며 방치하는 아버지가 살짝 야속하기도 했다.


지금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 알겠다. 부모가 강요한다고 아이가 갑자기 모범생이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깨달으셨나 보다. 어차피 남의 인생은 못 바꾸니 자신의 인생이라도 즐겨보겠노라고.




아버지는 내 삶의 열렬한 응원군이시다. 내가 인생 마디마디에서 소중한 결실을 거둘 때마다 가장 크게 기뻐해 주셨던 분이다. 내가 힘들어할 때면, 내 인생은 잘 풀리게 되어 있으니 큰 걱정 하지 말라며 절대 신뢰를 보내시곤 했다. 가진 것에 감사하라는 말씀도 자주 하셨다.


내가 잘 될 거라며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아버지를 떠올리니, 읽었던 책 제목도 기억 못 하는 나 자신이 처량해진다. 이대로 괜찮은 건가 싶어서 이번 주 영어 스터디 주제를 알츠하이머로 선정했다. 주제 선정 배경과 후보 질문들까지 다 정리했는데 뭔가 석연치 않다.


블로그에 기록해둔 예전 스터디 영어 주제를 뒤져보니, 더 슬퍼진다. 이미 작년 9월에 다뤘던 주제다. 놀랍게도 그때 내가 정리해둔 질문과 지금 질문이 대동소이하다. 아무래도 알츠하이머가 시작된 듯싶다. 치매에 좋다는 음식 좀 찾아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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