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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Jan 15. 2021

일본어를 배우는 이유

       

これ, これください。
(이것, 이것 주세요)


남편이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짚으며 주문을 했다. 남편의 짧은 일본어가 한편 부럽기도 하고, 한편 샘나기도 했다. 질세라 영어로 질문을 몇 개 던져봤지만 식당 주인과 통하지는 않았다. 영어를 못하는 분이었는지 난처한 표정만 짓고 그저 ‘하이’만 연신 읊는다.     


2017년 12월 끝자락을 우리 가족은 도쿄에서 보냈다. 가족여행으로 일본행은 처음이었다. 매년 가족을 위해 목돈을 쓰겠다고 통 큰 결심을 한 후 첫 목적지는 경비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옆 나라 일본으로 정했더랬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즐길거리로 가득한 오타쿠 문화의 근원지인 아키하바라에 숙소를 잡았다. 지하철로 도쿄 시내를 이동할 때마다 가족 중 그나마 제일 한자와 일본어에 익숙한 남편이 길잡이가 되었다.     


짧은 여정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귀국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외운 것이었다. 한 달 동안 천천히 글자를 암기한 다음에 딸과 함께 서점에 가서 일본어 기초 교재를 구입했다. 매일 저녁 퇴근해서 딸과 함께 일본어를 조금씩 공부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실 내 인생에서 일본어를 만난 건 이게 처음이 아니다. 1994년, 대학교 1학년 때 일본어 배우기에 한 번 도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수강신청을 했던 초급반 대부분의 수강생은 고등학교 3년 동안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배웠던 학생들이었다. 수강생들의 높은 수준에 맞춰 수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수업이 버겁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나는 미련 없이 수업을 중도하차하고 일본어와는 그 뒤로 담을 쌓았다.     


한참 두뇌회전이 좋을 20세에 F학점을 맞고 포기한 일본어를 만 마흔셋에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2018년 2월 딸과 스터디는 책 한 권을 한번 읽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하지만 홀로 하는 공부는 이어갔다. 중학교 때 가장 좋아했던 과목 중 하나는 한문이었다. 특히 형성 문자를 부수별로 쪼개 의미를 짚어가며 암기하는 게 흥미로웠다. 비록 한국식 한자와는 다소 다르지만 한자가 종종 등장하는 일본어는 쓰면서 공부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아이들과 교감의 폭이 넓어지는 것도 큰 기쁨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광팬인 큰딸과 아들은 자막 없이 봐도 일본어를 절반쯤은 알아듣는 수준이라 내가 뭔가 물어볼 때 쉬운 말은 일본어로 대답하곤 다. 아이들 옆에 있는 게 좋아서 함께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니 어느새 나도 애니메이션이 좋아졌다. 종종 들리는 익숙한 단어 몇 개 덕분인지, 아이들과 박장대소하며 즐기는 덕분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일본어를 공부한 후 아이들과 한결 가까워졌다.     




최근에 연신 경험하는 기적도 일본어 공부를 계속하게 해 준다. 까막눈이 트이면서 일본어로 적힌 간판을 하나둘 읽게 됐고, 화장실 안에 있는 지시문을 읽을 수 있고, KTX 기내 방송이 들린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들을 듣게 된 내 기쁨을 헬렌 켈러가 세상과 소통하게 되었을 때의 환희에 비한다면 너무 거창한 것일까?     


하루에 많은 시간을 내지 못해 일본어 실력은 아직 일천하다. 그럼에도 나름 야무진 포부를 품고 있다. 궁극적인 목표는 10여 년쯤 후 다시 한번 국제협력 업무를 맡아, 제대로 일본어 실력 발휘를 하고 싶다. 업무 일본어에 대한 갈급함을 느꼈던 것은 3년 전이다.


한일 고등교육 협력 사업과 일자리 관련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일본 측 대표와 여러 차례 만났다. 공식 미팅 때마다 양측에 전문 통역가가 있어 순차통역으로 회의가 진행됐지만,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주한 일본대사관 관계자 중 한 명이 한국어에 능통해 혼선을 빚는 대목에선 가끔 한국어로 정리를 해주곤 했다. 나도 이런 외국어 구사능력을 갖춘다면 좀 더 효율적으로 밀도 높게 업무를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 일본어 공부의 목표는 7월에 JLPT N2 시험에 합격하고, 하반기부터 전화일본어 수업을 수강하는 거다. 한국어가 유창한 일본인 친구와 올해는 일본어로 카톡 대화도 나눠보고 싶다.


외국어 공부는 처음에는 낯섦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단어를 하나하나 터득해나가는 재미에 쉽고 즐겁게 시작한다. 하지만 앎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좀처럼 진도는 나가지 않고 외워야 할 것들이 쌓이기 시작하면 쉽사리 중도에 포기하기 십상이다. 실용적이고 절실함이 따르지 않는 경우에는 포기해야 하는 이유를 백 가지쯤 찾아내는 건 쉽다.     


17년에 시작한 스페인어가 그랬고, 캐나다 시절 중국인 친구에게 잠깐 배웠던 중국어가 그랬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웠고 본고사까지 치르며 무척 좋아했던 독일어는 쳐다보지 않은지 30년 가까이 되어가니 이젠 알파벳 읽는 법도 가물가물할 정도다. 그럼에도 일본어는 영어 다음으로 내게 가장 중요하고 자신 있는 외국어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든다.     




なんでこんなに疲れてみえる?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지?)

딸과 일본어 스터디를 다시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되어간다. 입시를 다 치르고 시간 여유가 있던 딸에게 제안을 했더니 흔쾌히 받아줬다. 어제 퇴근 후에 함께 본문 회화를 읽는데, 연신 하품을 해대는 딸에게 물으니 대답 대신 교재에 있는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는다.     


つまらない本を読んで眠くなりました。
(재미없는 책을 읽어서 졸려졌습니다)   
  

둘이 손뼉 치고 시원하게 웃는 와중에 딸의 하품이 사라졌다. 딸도, 나도 더 즐겁게 나머지 공부를 했다. 오늘도 퇴근하면 딸과 일본어 공부를 이어나갈 생각에, 아직 출근도 하기 전인데 벌써부터 퇴근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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