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9시가 넘었는데 막내딸이 몇 번째 애원하고 있다. 이미 큰딸과 함께 줄자로 각종 신체 치수를 재어가며 깔깔대며 30분 이상 놀고 난 직후였다.
가슴, 허리, 엉덩이 둘레는 기본이고, 손목, 발목, 목, 머리, 얼굴 길이까지 재어보고 세 명의 수치를 비교해가며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신나게 웃었는데...
안돼! 엄마 모레 있을 일본어 시험공부해야 돼
"엄마는 늘 시험 보잖아요. 딱 30분만 딸들과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요. 네?"
막내 말이 맞다. 2주 전에 불어 시험을 봤고, 일어 시험에, 다음 주에는 회사 승진시험이 있다. 올 7월에도 일어시험을 본다고 정신없었고, 다음 8월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본다고 부지런을 떨었다.
막둥이는 아직 중 1이다. 엄마 손길이 아직은 좀 더 필요할 나이인데, 그동안 내 삶만 너무 부지런히 살아왔나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난달 초에도 국제행사로 2박 3일 집을 비우고, 그 담주에도 집합교육으로 3박 4일 곁을 떠났었다.
막내의 계속되는 애원에 3분 크로키를 시작했다. 그림을 안 그린 지 만 1년 하고도 반년이 지나간다. 사실 그림을 그린 기간이 1년 반에 채 못 미치기에 원래 나로 돌아갔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소묘를 안 한 지 오래돼서 자신이 없는데, 시간 제약이 있는 크로키를 하자니 더 내키지 않았던 것 같다.
모델은 세 명이 돌아가며 했다. 제일 먼저 내가 모델이 되었다. 손에는 일본어 단어장을 놓지 않고 대충 엎드려 공부하고 있는 나를 그리라고 했다. 3분 후 두 딸이 그린 그림을 보니 의외로 묘사가 괜찮다. 그림에 있어서는 언니를 따라가려면 멀었다고 생각했던 막내 솜씨가 그새 꽤나 늘었다.
다음엔 큰 딸이 모델이 되었다. 난 딸을 정면에서 보며 그렸고, 막내는 측면을 그렸다. 같은 모델이라도 보는 위치에 따라 그림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나니 슬슬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막내딸은 이미 친구들과 여러 번 해봤는지, 제법 난이도 높은 포즈를 취하곤 했다.
두 차례씩 서로 모델이 되어준 후, 더 하고 싶어 하는 막내를 달래고 세 명이 그린 네 장의 그림을 돌려가며 보면서 또 한차례 박장대소했다. 게임이 끝난 후, 막내는 언니가 그려둔 비어 있는 얼굴에 눈, 코, 입을 익살스럽게 그려 넣었다.
30분 추억 만들기로 만족했는지, 막내는 미련 없이 세 명이 그린 종이를 갖다 버렸다. 그림에 미련이 남은 눈길을 보내는 건, 정작 내켜하지 않았던 나였다. 막내가 버린 종이를 찾아 이렇게 뒤늦은 글까지 남기고 있으니.
어제 일본어 JLPT N1 시험지를 받아 들고, 금요일 밤에 신나게 놀기를 잘했다고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N1은 내겐 너무 어려운 시험이었다. 물론 공부가 꽤 부족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앞으론 부정 단어를 몇 개나 써가며 말을 꼬아대는 독해 공부에 시간을 쏟기보다 이제는 실전에 쓸 수 있는 회화에 집중하려고 한다.
마침 일본어 공부 인증을 함께 했던 일본에 거주하시는 스터디 멤버분이 회화 공부 버디가 되어 주겠노라고 선뜻 제안하셨다. 다음 주 승진시험이 끝나면 일어회화 뽀개기를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