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이 울리기 직전에 눈을 떴다. 막내 학교에선 또 밀접접촉자가 나왔다고 온라인 등교로 대신한다는 문자가 와있었다. 가족 톡방에 문자를 공유하니 바로 막내의 답이 뜬다. 막내가 일찍 일어났네!
반가운 마음에 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려는 순간. 잠깐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고 나는 연신 끙끙대면서 바닥에서 헤매고 있었다. 화장실에 있던 막내는 나오면서 "엄마, 괜찮아요?"를 반복했고, 거실에서 자던 남편은 깜짝 놀라 내 곁으로 다가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정신이 돌아와 처음 본 건 뒷덜미를 타고 흐르는 피였다. 뒷머리에서 연신 피가 쏟아지고 있었고, 잠옷도 피로 젖어가고 있었다. 내가 앉아있는 자리도 피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이었다.
상처부위를 살펴보던 남편이 당황하며 빨리 응급실로 가자고 재촉했다. 잠옷바람에 나갈 수는 없어 옷을 갈아입으려고 내 방으로 들어가는데 순간 현기증이 나면서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이러다가 죽는 건가..라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무섭고, 한편으로는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사고 비슷한 걸로 병원을 찾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3살 때 입었던 손화상을 치료하기 위해 스무 살 때 병원에 장기 입원했던 게 첫 번째 경험이니 무려 27년 전이다. 당시 굽어있던 손가락 7개를 펴기 위해 서혜부 살을 손가락에 이식하는 꽤 큰 수술을 했더랬다.
내 경험에서 유일했던 수술은 시간도 8시간이나 걸리고 병원 입원도 오래 해야 하는 거였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입원하고 오래 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힘은 들었지만, 병원으로 가면서 급한 대로 회사에 먼저 몇 개 톡을 보내 뒀다.
응급실 진료를 기다리면서 하나님께 화살기도를 올렸다. 제발, 큰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이번에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제대로 살겠노라고. 냉담한 지 꽤 오래됐음에도 마음 한편에는 계속 갈급함이 있었던 듯싶다. 며칠 전, 이수영 님의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는 간증을 접한 후 성경 읽기부터 재개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던 참이었다.
상태가 위중해 보이니 응급실에서도 바로 조치를 취해줬다. 상처가 약 6cm로 범위가 넓고 깊으니 일단 봉합 후 뇌출혈 등이 없는지 CT 촬영을 해보자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인턴처럼 보이는 두 분에게 설명해가면서 봉합을 하셨다.
의사 선생님은 국소마취를 하기 전에 연고를 찾으시며, 연고로 머리카락을 고정시키면 머리카락이 상처 주변으로 들어가지 않아 염증을 예방할 수 있다는 설명을 하셨다. 대신 머리 상처에는 연고를 쓰기보다 눈에 안 보이는 부위니 차라리 피가 나서 딱지가 생겨 상처를 빨리 낫게 하는 게 좋고, 얼굴처럼 보이는 곳은 흉터가 생기지 않도록 연고를 쓰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씀도 하셨다.
인턴 선생님들은 건성으로 듣는 거 같았는데, 정작 환자인 나는 신기해하면서 연고가 이렇게도 쓰이는구나.. 집에 가면 잊기 전에 기록해둬야지라는 생각에 맘이 바빴다. TED에서 좋아하는 강연 중 하나는 하버드 뇌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Jill Bolte Taylor)의 뇌졸중 체험 스토리다. 그 분은 뇌졸중으로 신체 마비를 겪는 와중에도 자신에게 일어나는 신체변화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뇌과학자로서 그런 경험을 한다는 것 자체를 매우 신기하고 감사한 기회로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분이었다.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상처부위 머리카락을 다 잘라내고 실로 봉합하는 방법, 의료용 스테이플러로 찍는 방법. 머리카락이야 없어도 가발을 쓰면 되니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그런데 몇 번의 마취주사 후에 의료용 스테이플러를 찍기 시작하셨다. 10번 정도 찍고 난 후 다 되었다며, 다행히 상처가 일자 모양이라 스테이플러로 대신했다고 하셨다. 그럼, 도대체 내 의견은 왜 물어보신 거지?
태어나서 머리 CT 촬영도 처음이다. 누우니 철심을 받은 뒷머리가 꽤나 불편하다. 웅웅하는 소음이 요란하게 들리는 곳에 들어가서 몇 분 있으니 다 끝났다고 하셨다. 이제 주사 맞을 일만 남았다. 파상풍 예방접종과 피부 알레르기 검사 후 항생제 링거를 맞았다.
CT를 판독하시던 선생님께서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다행히 뇌출혈 증상이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지만, 며칠 후 나타날 수도 있으니 신체 마비가 오거나 머리가 아프면 바로 병원으로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누워서 자다 보면 상처부위가 다시 벌어질 수도 있고 그러면 다시 재봉합을 해야 한다는 끔찍한 경고도 하셨다.
머리는 열흘 정도 절대 감아서는 안된다는 말을 덧붙이시면 인근 외과병원에서 소독을 자주 하고 푹 쉬어야 빨리 낫는다고 하셨다. 피로 떡진 머리에서 피 냄새가 가득한데 머리를 감을 수 없다니. 회사에 제출하려고 진료확인서를 떼어보니 내 병명은 <Laceration of scalp>이다. 왜 병명에 두피 열상이라고 한글은 안 적고 영어만 적는 거지?
집에 오니 막내가 내 사고의 전말을 말해줬다. 막내는 막 화장실에서 나오던 참에 내가 넘어지는 과정을 그대로 목격한 거다. 나는 처음에 뒤로 넘어지면서 화장실 모서리에 머리를 찧었고, 무리해서 일어나려다 뒷머리가 찢어진 충격을 못 이겨 다른 쪽 벽 모서리에 앞머리를 찧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른쪽 이마 언저리에 계속 통증이 있었나보다. 그 뒤로 나는 머리를 싸매고 계속 끙끙대며 일어나지 못했고, "나 피 나"라는 말만 아이처럼 되뇌었다고 한다.
물론 나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피가 흥건했던 마루는 막내가 물티슈로 깔끔하게 닦아뒀다.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다 컸구나라는 생각에 감동이 밀려왔다. 혹시 다시 넘어지면 안되니 앞으로 집에선 헬멧을 쓰고 지내라는 깜찍한 제안도 했다. 이 글에 넣을 그림도 막내가 그려줬다.집에 돌아온 직후 내 뒷모습이다.
안정을 취해야 하는 열흘간 예정되었던 모든 일정을 취소하느라 바빠졌다. 다음 주 예정이었던 시험부터 내년으로 미루고 어젯밤 예약했던 숙소와 기차표를 취소했다. 영어 스터디와 일어 스터디를 취소하고, 1:1로 진행하던 외국어 인증 버디분들께도 양해를 구했다.
PT 수업도 취소하고, 다이어트 카페에도 작별을 고했다. 블로그 이웃님과 오프라인 만남도 일단 미뤘다. 이번 주, 다음 주 업무 관련해 예정됐던 일정들도 부서원 분들과 다른 부서 과장님들께 부탁드렸다. 연말 발간 예정이었던 두 번째 책 에디팅 관련해 촉박한 일정이 맘에 걸렸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 최종 편집은 다른 공저자분들을 믿고 가는 수밖에...
한 시간 남짓 급한 일정 정리를 마치고 나니 극도로 피곤이 몰려들었다. 성경을 읽을 엄두는 안 나서 유튜브로 신약을 들으며 엎드려 잠을 청했다. 자세가 불편해 여러 차례 뒤척였는데, 놀랬던 긴장이 풀려서인지 어느샌가 숙면을 취했다.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올해 남은 3주도 정신없이 내달렸을 듯싶다. 일주일 동안은 시험공부에 전념했을 테고, 업무는 업무대로 맹렬 정진을 했을 게다. 내년도 업무 주요 방향을 잡겠노라고 서른 권 이상 책을 주문해 읽으려고 벼르던 참이었으니.
세 번째 책 관련한 컨셉을 잡겠노라고 퇴근 후엔 서점에서 시간을 보냈겠지. 내년 초 바디 프로필을 찍고 싶은 욕심에 새벽 운동에도 심혈을 쏟았을 거고.
부지런히 달려왔던 2021년, 마지막까지 가열차게 사는 대신, 그간의 시간을 되돌아보라는 의미로 그분이 주신 쉼표가 아닐까 싶다. 느린 템포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이번에 한 번 천천히 살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