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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자 Jan 21. 2021

그날 지하철에서 일어난 일

지하철 출퇴근족의 단상


지난 일요일 취재가 있어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다. 주말 아침이라 자리가 많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끝자리에 앉았다. 널찍하게 앉아서 가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작은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덩치 큰 남자가 타더니 바로 내 옆에 앉는 게 아닌가. 이상한 일이었다. 거리두기가 가능할 만큼 자리가 많은데 왜 내 옆에 앉았을까.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곁눈질로 보니, 남자가 입고 있는 롱패딩 끝자락이 지저분했다. 게다가 지하철을 타기 전에 담배를 피웠는지, 담배 냄새도 진하게 났다. 노숙인은 아니었지만, 깔끔한 사람은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불편했다. 일단 남자가 딱 붙어 앉아서 어깨를 펼 수가 없었다. 자세를 고쳐서 다시 앉아보고, 몸을 구석에 붙여도 봤지만,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이 남자가 혹시 몹쓸 짓을 하진 않을까 하는 불안했다. 대학생 시절, 지하철 옆자리에 앉았던 남자가 내 허벅지에 손을 얹고 추근댔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 몇 정거장 지나서야 간신히 내렸다.


그래서 이번엔 서둘러 내리거나 자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다음 역에서 내릴까, 옆칸으로 갈까, 가까운 자리로 갈까 고민하는 사이 몇 정거장이 지나갔다. 그렇게 이제나 저제나 때만 보고 있었는데, 마침 대각선 끝자리에 앉은 남자가 일어나서 내리는 게 보였다. 나는 잽싸게 그 자리로 이동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큰 용기가 필요했다. 맞은 편에서 보니, 남자는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움직인 걸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남자가 보이는 곳이라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넓은 자리에 앉으니 살 것 같았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은 또 생겼다. 환승해야 할 역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그 남자가 내리려고 일어난 것이 아닌가. 나는 같은 역에서 내린다는 걸 보여주기 싫어서, 문이 열릴 때까지 앉아 있다가 그 남자가 내린 뒤에 서둘러 내렸다. 남자는 휴대폰 영상을 보느라 걸음이 느렸다. 나는 더 느리게 걸었다. 남자의 앞쪽으로 가지 않기 위해...  늘 걸어서 올라가던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남자 뒤쪽에 잠자코 서있었다. 그리고 무사히 지하철을 갈아타고 출근했다.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말하니, 빨리 자리를 옮기면 되지 뭘 망설였냐고 묻는다. 그러게 말이다. 근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이후 닷새 동안 당시 상황을 계속 재생하며 곱씹어보는 중이다. 다른 여자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앉아 있었을까? 아니면 빨리 이동했을까? 아니면 나처럼 눈치보며 마음 고생을 했을까?


차를 팔고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한 지 10년이 되어간다. 몇 달 전 서울 외곽으로 이사를 한 뒤, 지하철로 장거리 출퇴근을 하고 있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19정거장. 환승과 대기 시간을 감안하면 1시간 남짓 걸리는데, Full로 서서 가면 허리와 다리가 꽤 뻐근하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엔 핑크빛 임산부석에 앉고 싶기도 하지만, 양심은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마음에 꾹 참곤 한다. 운 좋게 앉아서 가는 날엔 책이나 영상을 보고 단잠을 자는데, 이 시간이 아주 달콤하다.


퇴근길은 출근길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편이다. 내가 주로 타는 5호선 종점이 갈라지기 때문이다. 상일동행과 마천행이 퐁당퐁당 오니, 대기 시간이 더 길다. 이사 초기엔 멍하게 있다가 종점을 보지 않고 타서, 힘들게 돌아간 날도 여러 번 있었다. 그래도 지하철을 타면 1시간 안팎으로 출퇴근을 할 수 있어 선호하는 편이다. 버스를 타면 시간이 더 걸리고, 택시를 타면 2만원이 넘게 나와서 엄두가 안 난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지하철 출퇴근이 조심스러워진 게 사실이다. 거리두기가 무색하게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같은 겨울철엔 다들 옷이 두꺼워 앉은 자리도 선 자리도 더 좁아졌다. 옷 뒤로 큼직한 털모자가 달린 분들, 커다란 백팩을 맨 분들 뒤에 있으면 더 힘들다. 그래서 털모자가 달린 롱패딩을 거의 안 입고 있다. 가방은 주로 옆으로 메곤 했는데, 이마저도 자리를 차지할까봐 짐을 최소화해서 가방 없이 다니는 날이 많다.


장거리 출퇴근을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남편이 차를 한 대 뽑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고민 중이다. 이미 남편이 차를 운행중인데, 나까지 차를 사면 1가구 2대가 되는 셈이다. 돈도 돈이지만, 아픈 지구가 영 마음에 걸린다. 좀 고단하지만 지하철 출퇴근을 이어갈지, 하이브리드나 전기차를 살지 조금만 더 고민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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