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기자 Jan 25. 2021

보도국에 걸려오는 전화들


기자 생활 16년째. 회사에 있는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주로 출입처나 취재 현장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은 앵커와 데스크를 하느라 주로 회사에 있었다. 요즘은 코로나로 외부 취재를 자제하는 분위기라 회사에 있는 시간이 많다. 그런데 내근이 많아지면서 그동안 미처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됐다. 바로 보도국에 걸려오는 전화 응대가 그것이다.


(따르릉) 네, 보도국입니다.

"제가 성모 마리아를 봤는데요. 취재를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성모 마리아를 보셨다고요? 언제 어디서요?

"197X년 OO에서요."


굉장히 오래 전 일이네요. 놀라셨겠어요.

"그럼요. 제가 지난번에도 전화해서 말했는데 취재를 안 오셨어요."


성모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어요?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나셔서요. OOO라고 했어요. 그리고... 저희 엄마도 봤어요."


처음엔 이분이 기적을 경험하신 건가 싶어서 귀를 기울였는데, 안타깝게도 들으면 들을수록 신빙성이 떨어졌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전화를 끊지 않는다는 것. 10분 정도 듣다가 공손하면서도 분명하게 말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희가 검토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성함이랑 연락처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러니까 취재를 오실 건가요?"


검토해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아요. 성함이랑 연락처 적을게요. 불러주세요.

"제 이름은요.... 번호는요...."


이런 전화를 받고 나면 진이 빠진다. 바쁘게 일하다가 전화를 받으면 허탈하기까지 하다. 보도국에서 혼자 야근을 하던 날엔 이런 전화도 받았다.


(따르릉) 네, 보도국입니다.

"여기 OO인데요. 제가 라디오에서 DJ를 하고 싶어서요."


아, 방송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제가 방송에 소질이 있어서 OO엔터테인먼트랑 계약을 할 거거든요."


OO엔터테인멘트면, 3대 연예기획사잖아요!

"네, OO엔터테인멘트에서도 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천주교 신자라서 OO방송에 미리 말씀드리는 거에요."


그렇게 생각해주셨다니 감사하네요.

"제가 우울증이 좀 심해서 치료를 받긴 했어요. 그래도 OO엔터테인먼트랑 계약을 할 거니까..."


성함이랑 연락처 말씀해주시면 전달할게요. 저희도 검토를 해봐야 하니까요.

"이름은요..... 번호는요...."


이런 전화를 몇 번 받으면, 전화벨이 울릴 때 선뜻 받기가 꺼려진다. 하지만 전화를 안 받을 순 없다. 중요한 전화가 걸려올 때도 있기 때문이다. 퇴근 시간 무렵이었다. OOO 주교 선종 소식이 들어와 속보를 쓰고 있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릉) 네, 보도국입니다.

OO방송이죠?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OOO 주교님이 좀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드리려고요.


그러세요. 전화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은 소식을 듣고 속보를 준비 중이에요. 그런데 전화주신 분은 누구시죠?

저는 OOO 주교님의 유족입니다. 경황이 없지만, OO방송엔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이날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먹먹해졌던 기억이 난다. 보도국에 걸려오는 전화 중엔 기분 좋은 전화도 있다. 바로 뉴스를 보고 내용을 묻는 전화다.


방금 뉴스에서 소개된 책, 어디서 살 수 있나요?

오늘 뉴스에서 예고한 행사, 혹시 중계하나요?


이런 전화가 오면 미소가 지어진다. 우리 뉴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뉴스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전하는 전화도 걸려온다. 의견이 강해서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마저도 관심과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OOO 출연시키지 마세요. 그 사람은 OOO 해서 나오면 안 돼요.

OOO 문제는 왜 안 다루나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데...



뉴미디어 시대라고 하지만, 전화는 여전히 시청자와 청취자의 의견을 듣고 소통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특히 사무실 전화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전화가 오면 친절하게 받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다른 부서에 관한 문의는 담당자의 자리 번호를 전하고 전화를 돌린다. 돌리다가 연결이 끊어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대면취재를 자제하면서 전화취재가 부쩍 늘었다. 내근을 하며 전화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상대방이 내 전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 최대한 짧고 분명하게 용건을 전달하려고 노력 중이다.

 

월요일 출근길, 오늘은 어떤 전화를 받게 될까. 어떤 전화든 부담 없이 척척 받으려면, 아직은 내공이 더 필요하다.

작가의 이전글 그날 지하철에서 일어난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