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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자 Feb 17. 2021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

선종 12주기에 부쳐


12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하다. 2009년 2월 16일 늦은 오후, 빨리 강남성모병원으로 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김수환 추기경이 위독하다고 했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선배들과 병원으로 갔다. 병실 내부 취재는 허용되지 않아, 문 앞에서 눈과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의료진이 병실을 분주히 오갔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주교와 사제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두어 시간쯤 흘렀을까.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가 병실에서 나와 김수환 추기경 선종을 공식 발표했다. 선종 시각은 오후 6시 12분.


슬퍼할 새가 없었다. 평화방송은 즉시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속보 체제에 들어갔다. 나는 병원에서 라디오 전화연결로 추기경 선종 소식을 전했다. 선종에 대비해 초안을 써두긴 했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기사를 차분하게 수정할 여유가 없었다. 순발력을 발휘해 상황을 시시각각 업데이트 하며 소식을 전하길 몇 차례. 오후 9시 무렵, 병실 문이 열리더니 안구 적출을 마친 추기경의 시신이 하얀 천으로 덮인 채 나왔다. 시신은 바로 명동대성당으로 옮겨져 유리관에 안치됐다.


나는 그날부터 명동대성당 꼬스트홀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 상주하며, TV와 라디오 뉴스를 실시간으로 커버했다. 매서운 추위에도 조문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각계 인사들의 조문도 끊이지 않았다. 속보 방송은 장례미사 당일까지 장장 5일간 계속됐다.




나는 평화방송에 입사해 4년 가까이 추기경을 취재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취재는 2005년 12월 16일 성탄 대담 녹화다. 나는 그날 추기경의 눈물을 보았다.


사실 대담은 일찌감치 잡힌 일정이었다. 그런데 전날 저녁 황우석 교수가 배아줄기세포를 갖고 있지 않다는 폭로가 나오면서, 당초 의도와 달리 추기경의 입장을 듣는 자리가 됐다. 나는 추기경의 반응이 몹시 궁금했다. 한국 천주교가 인간 배아를 파괴하는 황 교수의 연구에 반대해온 만큼, 추기경이 황 교수를 질책할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추기경은 "세계 앞에 한국이, 한국 사람이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추기경은 떨리는 입술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느님이 한국 사람에게 너무 좋은 머리를 주셨어요. 그런데 그 좋은 머리를 좋게 쓰지 않고..." 추기경은 이렇게 말하고 또 울었다.


사진 출처 = 평화신문


추기경은 마음을 진정시킨 뒤, 쓴소리를 했다. "우리는 스스로 너무 잘났고 똑똑해요. 똑똑해서 좋은 것도 있지만, 이것을 잘못 쓰면 거짓이 되고 사기가 돼요. 치유는 달리 없죠. 한국 사람들에겐 우직한 게 필요해요. 우직한 사람들은 정직하죠. 속죄하고, 잘못했다고 빌고... 모두가 바르게 사는 것. 정직하게 사는 것. 그것 밖에 없습니다."


추기경의 눈물은 큰 화제가 됐다. 조간신문에서도 우리 회사의 사진을 제공받아 1면에 큼직하게 실었을 정도다. 대담 촬영이 끝나고, 선배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추기경 회고록에 사인도 받았다. 당시엔 풋내기 시절이라 그 의미를 잘 몰랐는데, 이날 취재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됐다.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은 선종 후에도 이어졌다. 가톨릭대 김수환추기경연구소가 2013년 선종 4주기를 앞두고 주최한 수기 공모에 당선된 것이다. 추기경을 취재한 사연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에 응모했는데, 뜻밖의 수상으로 이어졌다.



추기경 덕분에 받은 상이었다. 오랜만에 상장에다 상금까지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수상작들이 「내가 만난 추기경」이라는 책으로 발간돼 더욱 의미가 깊었다. 수상자들의 글을 읽어보니, 애틋한 사연이 많았다.



추기경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12년이 흘렀다. 나는 올해 추모 리포팅 제작을 자원했다. 방송 준비를 위해 며칠간 추기경의 영상을 보고 또 보면서 혼자 울다가 웃다가 만감이 교차했다. 한 문장, 한 문장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기사를 썼다.


http://www.cpbc.co.kr/CMS/news/view_body.php?cid=796722&path=202102


스스로를 바보라고 부른 추기경.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시기. 거룩한 바보의 사랑과 고언이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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