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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자 Dec 13. 2020

82년생 김지영과 81년생 김혜영

같은 점과 다른 점


TV 채널을 돌리다가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작년에 극장에서 봤는데도, 다시 보니 새로웠다. 영화를 본 뒤 한참 생각을 정리하다가, 후배한테 빌려놓고도 읽지 않았던 원작 소설이 생각났다. 그래서 뒤늦게 소설을 읽었다.


이미 아는 내용인데도, 마지막 책장을 고 나니 마음이 무겁고 헛헛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글로 써보기로 했다. 일단 소설 앞부분을  이야기로 바꿔서 써보았다.





김혜영 씨는 우리 나이로 마흔 살이다. 6년 전 결혼했고 아이는 없다. 여덟 살 많은 남편과 서울 끝자락의 한 대단지 아파트 84㎡에 거주한다. 남편은 병원에 다니고, 김혜영 씨는 방송국에 다니고 있다. 남편은 출퇴근이 일정하고, 토요일엔 격주로 출근한다. 시댁은 성남이다. 친정 아빠는 오래전 퇴직했고, 친정 엄마는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주말은 주부 김혜영의 시간이다. 아침에 느지막이 눈을 뜨니, 첫눈이 내렸다고 남편이 전해준다. 첫눈을 보고 싶지만, 이불 속이 포근해 일어나기 싫다. 누워서 휴대폰을 한참 만지작 거린다. 뉴스도 보고, SNS도 들어가 본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샤워를 하고 청소기부터 돌린다. 방 3개와 거실, 부엌까지 도는데 10분이면 족하다. 싱크대엔 어제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지 않은 그릇들이 쌓여있다. 다용도실엔 재활용 쓰레기가 가득하다.


남편이 느릿느릿 설거지를 시작한다. 설거지하는 모습을 오래간만에 본다. 아까 침대에서 "요즘 통 설거지 안 하지 않았냐"고 한 마디 했더니 찔렸나 보다. 나는 재활용 쓰레기 정리에 나선다. 종이는 종이대로,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대로, 봉지는 봉지대로 분류한다. 택배 박스는 덕지덕지 붙은 테이프를 떼어내고 가지런히 접는다. 속을 헹궈서 말린 우유팩도 납작하게 접는다. 양손 가득 재활용 쓰레기를 들고 내려가 분리수거장에 배출한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빨래를 돌린다. 이틀에 한 번 빨래를 하는데, 내 빨래보다 남편 빨래가 더 많다.


집안일을 얼추 마무리하니 낮 12시. 아점 먹을 시간이다. 설거지를 마친 남편이 돼지고기와 양배추를 볶아서 제육볶음을 해 먹자고 한다. 대충 볶으면 된다고 한다. 말투가 어쩐지 나더러 하라는 것처럼 들린다. 평소 같으면 내가 혼자 했겠지만, 「82년생 김지영」이 생각나서 또 한 마디 했다. "집안일은 같이 하는 거야. 같이 만들자". 파기름을 내고 고기와 야채를 볶으니, 남편이 소스를 넣어 볶는다. 남편의 화려한 웍질을 보며 흐뭇해하는 순간, 하얀 타일에 빨간 국물이 후드득 튄다. 나는 얼른 키친타월을 꺼내 국물을 닦아낸다.


진눈깨비였던 눈이 함박눈으로 변했다. 눈 구경을 하며, 눈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은 남편은 자기 밥그릇과 수저를 싱크대에 담가놓고, 방에 들어가서 게임을 한다. 나는 내 밥그릇과 수저, 야채를 다듬은 도마와 칼, 접시, 주걱 등을 싱크대로 옮기고, 김치통을 냉장고에 넣고, 식탁을 닦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며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한 문단쯤 썼을까. 세탁이 끝났다는 알람이 울린다.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남편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글쓰기를 멈추고, 빨래를 꺼내서 건조대에 넌다. 다시 노트북 앞에 앉으니 흐름이 끊겨 글이 안 써진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집안일에 적극적이지 않은 남편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일이 밀려 있어, 잠시 기자 김혜영으로 돌아간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쓴다.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간다. 마음이 급해진다. 아무래도 저녁을 차려먹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행히 남편이 밖에 나가서 순댓국을 사 먹자고 한다.




82년생 김지영과 81년생 김혜영의 삶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둘 다 흔한 이름을 가진 국문학 전공자이지만, 김지영은 전업주부로, 김혜영은 기자로 살아간다. 두 여성의 삶이 달라진 원인에는 임신, 출산, 육아가 있다. 나는 아직 경험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연대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실제로 주변에서 임신, 출산, 육아로 힘들어하는 선후배들을 많이 보았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무거워진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해준 책이 있다. 미국 ABC 뉴스 조주희 한국지국장이 쓴  「우아하게 저항하라」. 얼마 전 타사 여기자로부터 선물을 받아 읽었는데, 기자 선배이자 워킹맘으로서 김지영과 김혜영이 참고할 만한 조언이 가득하다.


여전히 남성이 주류인 언론계에서 여성 기자로 일한다는 것은 도전의 연속이다.

내 취재의 결과물인 기사보다는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과 외모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포진한 이 사회를 살아가며 현실을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한편, 터득한 것도 있다. 결국 상대방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기에 매번 취재를 나가거나 미팅을 할 때 헤어와 의상을 프로답게 보이도록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기도 했다.

고학력에다 한창 일할 나이의 여성들이 가정과 육아 때문에 일하지 못한다면 엄청난 사회적 낭비이고 국가 경쟁력의 손실이 아닌가. 정부에서는 육아지원제도나 보육지원을 확대한다고 하고 공동육아 같은 대안도 제시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까? 나는 홍콩과 싱가포르처럼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들이는 것이 워킹맘들에게 훨씬 더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지킬 수 있는 번거로운 고민을 자주 하라. 이런 고민을 해보지 않았다면 그 상황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는 집에 가서 남편에게 상사의 만행을 이르며 위로를 구하거나, 괜히 아이에게 짜증을 부리거나, 혹은 그런 말이나 듣는 자기 자신을 탓하는 수순으로 흐른다. 결국 말을 함부로 하는 상사에게 듣기 싫은 소리 한마디 들었는데 내 멘탈만 망가지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1호 팬이 되어보자.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은 눈빛과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

일터에서 롱런하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 마인드와 제대로 된 실력이다.


나는 올해 마흔 살을 맞이했다. 연초만 해도 내 나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서글펐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실력을 바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거침없이 도전해나가며 살자고 말이다. 브런치가 그 발판이 되길 바란다. 내가 조주희 기자의 책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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