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냐의 비극 그리고 받아들여짐에 대하여
들어가 전에
이하의 글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을 읽은 이후 저의 감상을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의 관점으로 적어본 글입니다. AI가 글을 쓰는 시대에 사람이 쓴 글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를 고민하는 요즘입니다. 단순히 설명이나 기계적 비평을 넘어 저의 감정을 이입해 쓰려고 최대한 노력 중입니다.
지난주 토요일 새벽에 팟방과 아이튠즈에 '[고전으로 읽는 오늘] <죄와 벌 2부>_살인자 ㅇ난감'이 업로드되었습니다. 기획, 녹음, 편집에 거의 한주 이상의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명예를 얻는 일도 아니지만, 고전을 읽고 싶지만 높은 벽에 부딪힌 많은 사람들에게 작은 촛불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최선을 다해 제작하고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기에 기쁜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지만, 여러분의 격려와 청취는 앞으로 양질의 콘텐츠를 만드는데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좋아요, 댓글, 구독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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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난한 대학생과 그 가족의 치욕
나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유학 중인 대학생 라스꼴리니코프다. 어제 다음 학기 공납금 고지서가 도달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없다. 작고 초라한 방구석에서 한 달 한 달 어렵게 연명하고 있는 나에게 공납금 고지서는 나의 불행을 알려주는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다. 최근에는 그나마 있던 가정교사 자리도 잘렸다. 가난과 굴욕 속에 나는 곧 말라비틀어져버릴 것 같다. 신도시 페테르부르크의 찬란한 거리는 화려하기만 하다. 그러나 시끄럽고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음습한 뒷골목, 성나고 취한 사람들, 악취가 진동하는 술집, 싸우는 이웃 사람들의 고함과 절규 속에 내 영혼은 정처 없이 부유한다. 그리고 지금 내 육신은 비좁고 우울한 이곳 나의 작은 방 안에 갇혀버렸다. 가난과 굴욕 속에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갇힌 여기는 방이 아니라 장례식장의 관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게서 편지가 왔다. 어머니는 나를 우리 집안의 전부이자 유일한 희망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내가 가정교사와 다른 일자리를 잃었기 때문에 생활비며, 학비를 내지 못하고 있어 너무 슬프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 때문에 천사 같은 동생 두냐가 스비드가일로프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을 시작했다. 1백 루블을 가불 받아 그중 60 루블을 내게 보냈다. 나는 두냐의 생명과 같은 돈을 받았지만 생활비와 학비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자체가 나를 너무 무기력하고 슬프게 만든다.
그런데 어머니가 두냐에 대한 걱정스러운 소식을 전하시는 것이 아닌가? 개자식, 스비드가일로프가 내 동생을 건드렸다. 나쁜 개새끼는 한 가정의 책임 있는 가장이면서도, 두냐에게 돈을 주겠다고 수 차례 꼬신 것도 모자라, 시골이나 외국으로 함께 떠나자고 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정원에서 자기 남편이 두냐에게 애원하는 소리를 듣고 마르파 베뜨로브나는 두냐의 머리채를 잡고, 고함을 지르며 생난리를 쳤다. 그것으로도 분이 안 풀렸는지 시내뿐 아니라 변두리까지 방방곡곡 두냐와 자기 남편이 불륜이라는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다.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
이 일 때문에 어머니는 앓아누우셨다고 했다. 그러나 착한 두냐는 담대하게 이 일을 해결해 나갔다. 스비드가일로프가 양심이 있었는지, 두냐가 쓴 편지를 마르파 베뜨로브나에게 보여 줬다고 한다. 그 편지에서 두냐는 분노에 가득 찬 말투로 아내에 대한 그의 행동이 고결하지 못하다고 분명히 비난했다. 한 집안의 아버지이며 가장으로서, 불행하고 힘이 없는 처녀를 유린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스비드가일로프 집의 하인들도 두냐를 두둔하는 증언을 해줬다고 한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한 가슴을 부여잡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스비드가일로프의 아내도 두냐의 무죄를 알고 두냐의 편지를 들고 가가호호 다니면서 낭송까지 해 주며 두냐의 구명을 도왔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불행 중 다행이다.
2. 불행은 분리에서 시작한다
이 모든 불행은 내가 페테르부르크로 대학 진학 하면서 시작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연금(일 년에 총 120 루블)은 어머니의 생활비만으로도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어머니와 동생을 떠나 이 도시로 오면서부터 사랑의 원천인 가족과 분리되었다. 나는 넓은 세상으로 나오면서 동시에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매일 밤 갇힌 방 안에서 고독한 죽음의 공포에 치를 떨었다. 젊음이란 바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죽음과의 혹독과 대결이고, 태양을 사랑하는 동물의 근원적 공포일지도 모른다. 나의 청춘은 악몽 속을 헤맨다. 나는 밝은 미래를 꿈꿀 여지가 없다. 그런 환상을 찾을 만큼의 경건함을 잊은 지 오래다.
나는 저 심연의 골짜기를 보면서, 내면의 침울하고 엄숙한 비명을 보면서, 해가 떨어지면 사라지고 마는 색채의 죽음을 보면서 부정당한 내 미래의 단면을 발견한다. 내 젊음은 그 어두움을 온몸으로 껴안은 무채색의 죽음이다. 나는 그때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진보란, 스스로 의식하는 죽음의 창조라는 걸 확실하게 것이다. 나는 이런 어두운 인식이 어머니와 동생의 헌신적인 사랑이 사라진 후 찾아온 것임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죽음은 삶에서 의미의 부재를 경험하고 상급이나 형벌에 대한 약속이 없이 궁극적으로 무의미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3. 동생을 향한 한 남자의 진심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나를 찾아왔다. 그 음흉하고 추잡한 그 인간을 만났을 때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내 동생을 유린하고 그것도 모자라 지금 나를 찾아와 자신의 정당성을 항변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역겨워서 구역질이 날 정도이다. 처음부터 그는 자신이 악당이 아니라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다.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에게 미국이나 스위스로 도망가자고 제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고귀한 감정이라면, 순수하게 행복한 삶을 꿈꾼 정열의 노예였다면 자신을 악한 존재로 단정 지을 수 없지 않을까라 항변한다. 나는 그의 진지한 항변이 가소로웠다.
그는 자신의 아내 마르파 뻬뜨로브나를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라 했다 그녀는 어느 날 점심 식사를 배부르게 먹은 후 포도주를 반 병이나 마시고, 곧바로 목욕탕에 들어가는 바람에 뇌출혈로 사망했다고 했다. 의사의 소견까지 있으니 필요하면 확인시켜 주겠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는 그가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이건 완전 사이코 패스 아닌가? 비록 그가 그의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평소 자주 때리고, 심지어 승마용 채찍으로 때렸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다. 봐라, 그는 아내에게 가차 없는 폭행을 가하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 아닌가? 이것에 대한 그의 답변도 가관이다. 하지만 그는 아내와 7년을 살면서 서로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고 했다. 그동안 채찍을 든 적은 딱 두 번밖에 없었지만, 지역 언론이 자신을 악당, 반동주의자 농노제 지지자로 여론 몰이하면서 작은 사건을 확대 해석한 마녀사냥이라 항변했다.
그런데 이 남자와 얘기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하다. 그는 내가 그동안 전해 들어온 속물이 아닌 것 같다.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 놀라울 정도로 순박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 그는 과학, 특히 해부학을 신뢰한다. 자주 해외에 나가지만 나폴리 해변에 물드는 아침노을을 보면서, 고국을 그리워하는 감성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죽은 아내의 유령을 세 번이나 봤다고 한다. 노파 살해 이후 갖은 망상에 시달리는 나의 사정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자신도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 동생 두냐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의 마음은 진심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의 감정이 아닌 한 여인의 인생이 잘못되지 않게 하기 위한 연민이나 헌신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 때문에 고통당한 두냐를 위해 1만 루블을 줄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루쥔과의 결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대해 달라고는 말을 전했다. 하물며 두냐가 루쥔과 결혼하더라도 약속한 1만 루블은 지급할 것이라도 했다.
4. 불안을 이용한 루쥔의 큰 그림
여러 번 얘기했지만 나도 루쥔을 무척 싫어한다. 그의 음흉한 속셈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지탄받던 시기에 그는 동생에게 승냥이 같이 접근했다. 나는 그가 몸서리치도록 싫다. 그런데 그 작자가 내가 소냐의 가족들에게 내가 가진 돈을 전부 준 사실을 알고 문제 삼는 말을 했다. 두냐가 어렵게 번 돈을 소냐 가족들에게 허비했다면서나와 소냐를 함께 모독했다. 그리고 소냐를 어머니와 동생에게 데리고 올 수 있냐며 도발했을 때 나는 그를 죽이고 싶은 감정을 참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나는 한마디 했다. “당신의 장점을 다 긁어 모아도, 당신이 돌을 던지고 있는 그 불쌍한 아가씨의 새끼손가락만큼의 가치도 없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처음 문제를 일으킨 유부남 스비드가일로프가 어제 나를 방문한 덕분에 루쥔의 천박하고 음흉한 계획이 탄로 났다. 이 자식은 정숙하고 가난하고(이 가난한 것이 중요하다), 젊고 아름다우면서도, 가문도 좋고 교육도 잘 받은 두냐를 평생 노예처럼 부려먹고 복종시킬 계획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운 좋게 돈은 좀 벌었을지는 몰라도, 천박한 상인에 불과하다. 그 녀석이 두냐에게 접근한 이유는 그녀를 이용해 페테르부르크 상류 사회로 진입할 욕심 때문이었다.
루쥔은 모욕적 이게도 두냐에게 일생의 반려자가 될 사람에 대한 사랑, 남편에 대한 사랑은 오빠에 대한 사랑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괴변을 시전 했다. 나와 자신은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그 유명한 대사를 패러디한 ‘오빠냐 아니면 루쥔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뺨치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내 동생 두냐를 노예처럼 부리겠다는 승냥이의 이빨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인생의 쓴맛을 겪어 본 가난한 여자와의 결혼이 유복하게 자란 여자와 결혼하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더 유익할뿐더러, 부부 관계에도 유리하는 말의 의미는 너무나 야비하고 무례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무례함과 이상한 괴변에 어머니, 동생, 그리고 친구 라주미힌 까지 분노했다. 이제 그는 인간으로서 최악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냐에 대해 나쁜 소문이 시내 구석구석에 퍼졌을 때 자신이 두냐와 결혼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두냐의 명예가 회복되었으므로 그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진짜 가소롭기 그지없다. 이 얘기를 듣고 있던 라주미힌이 나선다. “저 사람 미친 거 아냐?” 라주미힌은 이런 루쥔을 계획을 모두 간파한 후 그의 면전에서 더러운 의도를 까발리며 모욕을 줘 쫓아 버렸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나는 어찌나 통쾌하던지…
5. 진정한 친구 가족이 되다
오늘 나는 날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했던 불쌍한 나의 동생 두냐를 구할 수 있었으므로 너무 행복했다. 내 친구 라주미힌은 두냐의 보디가드를 자처하며 눈동자처럼 그녀를 보호하겠다 장담했다. 여기 있는 모두는 서로 필요한 존재들이므로 어머니와 두냐가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내가 살고 있는 집주인이 가지고 있는 아파트를 알고 있다. 그곳은 독립된 공간이고, 가구도 있고, 가격도 저렴하고, 비록 작지만 방도 3개나 된다. 우선 자신의 시계를 전당포에 맡겨 돈을 가져오겠다 한다.
그는 친구로서 동료로서 함께 사업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지금 자신은 삼촌에게 1천 루블을 빌릴 수 있으면, 자신이 수완을 발휘할 수 있는 출판업을 시작해서 번역을 병행할 수 있다면 괜찮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며 자신했다. 나는 라주미힌이 전도유망한 사업가인 것을 신뢰하고 있으며, 대여섯 권의 책이라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생도 어머니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의 진심 어린 희망에 찬 계획을 들으며 나는 크게 안심했다
이 감동적인 순간에 나는 갑자기 이별을 고했다. 마치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사람처럼. 어머니와 동생은 아연실색했다. 그러나 라주미힌이 메신저를 자처했다. 라주미힌과 가족들은 내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왠지 불안해하고 아파 보이는 나를 걱정했다. 영문을 모르는 가족들도 두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족들에게 몸도 좋지 않고 마음도 불안하므로 상태가 호전되면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아니 내가 죽든 살든 나를 완전히 잊어 달라고 했다. 가족들과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천천히 방을 나왔다. 그런데 친구 라주미힌은 내가 정신적으로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복도에서 나를 붙잡는 라주미힌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의 타는 듯이 날카로운 강력한 눈동자를 똑똑히 지켜봤다. 그리고 그는 영혼을 꿰뚫는 나의 시선에 무언가 무시무시한 어떤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라주미힌은 방으로 돌아와서 엄마와 두냐를 위로했다. 내가 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고, 지금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으니까, 나를 자극하지 말자고 했다. 그리고 매일 자기가 나는 돌볼 것이며, 가장 훌륭한 의사를 찾아 진료를 받게 돕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이후로 라주미힌은 우리 가족에게 아들이자 오빠가 된 셈이다.
6. 받아들임 acceptance
우리 인생이 고통당하고 실패하고 있을 때 우리를 인정해 주고 우리 편이 되는 줄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가 성공하고 승리를 거두고 있을 때는 나의 편이 있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증오와 멸시 속에서 사랑은 태어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은 의미가 있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생명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모든 절망적인 순간에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나로 존재할 대담한 용기를 갖기로 결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용기가 위대한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존재라고 목청껏 소리 높여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의 지탄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든든히 이겨내는 힘은 나로 존재할 용기와 그 받아들여짐 속에서 나온다. 수많은 거절과 부정 속에서 또는 노예적 억압과 유린을 넘어 두냐와 우리 모두는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 우리 모두는 비존재의 위험 속에서도 등장하는 존재의 자기 긍정을 경험하고 있다. 긍정의 힘은 용기 있는 모든 행동 속에서도 가족과 친구와 공동체의 받아들임 속에서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과 악마의 상징적인 모습이 보여 주는 것처럼, 이 시대의 불안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인생이라는 배가 운명의 파도에 밀려가기는 하지만 인간은 그 배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할 자유를 지녔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무수히 많은 비합리적 두려움들 속에서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진정한 힘은 오직 받아들임(Acceptance)뿐이다. 나를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살아갈 의지와 힘을 얻을 수 있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아로부터, 타자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진리와 신에게서 분리된 모든 인간들에게 ‘
너는 받아들여졌다(You are accepted)’라고 담대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매일매일 순간순간 연결의 기적을 경험하면서.
<참고 서적>
죄와 벌, 또스또예프스키(홍대화), 열린책들
존재와 용기, 폴 틸리히(차성구), 예영
페스트, 까뮈(변광배), 더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