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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Feb 21. 2024

살인자 ㅇ난감 리뷰: 우리는 히어로를 가질 수 있는가?

<죄외 벌>과 <살안자 ㅇ난감> 작품 비교


1. 사실주의 소설, 죄와 벌의 흥행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사실주의 소설이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장편 소설에 대해 엄청난 기대와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인생의 중반이 45세의 나이에 자신의 창작 열의가 담겨 있는 잘 무르익은 열매와도 같은 작품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1859년 형에게 쓴 편지에서 죄와 벌 구상에 대한 내용을 이렇게 밝혔다.



“형, 기억나? 내게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았다면, 형기를 마친 후 쓰고 싶다고 했던 소설 말이야. 내 가슴과 영혼을 모두 이 소설에 쏟아부을 거야. 고뇌 속에서, 나 자신이 둘로 갈라지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순간에, 나무 판때기에 누워 형기를 채우며 이 생각을 생각했어. 그 소설은 결정적으로 내 명성을 높여 줄 거야”<1859년, 형에게 쓴 편지>



재미있는 것은 그의 소설이 발표된 직후 1866년 죄와 벌이 모스크바에서 대학 휴학생 다닐로프가 고리 대금업자와 그 하인을 칼로 찔러 살해 금품을 강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주요 일간자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이듬해 2월 다닐로프의 형이 확정될 때까지 심리 과정은 상세하게 다뤄졌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다닐로프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소설을 이미 소설의 초고를 완성했다. 오히려 다닐로프는 잡지에 게재된 1회분 소설을 읽지 않은 시점에 범죄를 저질렀다. 놀라운 우연의 일치이다. 다닐로프 사건이 맞물려 <죄와 벌>은 도스토옙스키를 일약 스타로 발돋움시켰다.

구독자 수가 증가 당시 <죄와 벌>은 연재소설, 회기가 증가할수록 독자들은 열광했다.


이어서 1866년 4월 모스크바 대학을 중퇴한 까라코조프가 학교 입구에서 황제를 시해를 시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명문대 재학생의 황제 암살을 시도는 러시아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은 사태의 중심에 있었다. 독자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소설의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를 떠올렸다. 가난한 대학 중퇴생, 노파 살인 등의 주제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재현하고 있는 것 같았기 대문이다. <1866년 한 해 동안 독자들은 오로지 하나 <죄와 벌>만 읽었다>


2. 공리주의적 살해의 정당성?


라스꼴리니코프의 살인의 진행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그는 자신의 논문 주제인 공리주의와 초인사상에 근거해 불의한 부자인 전당포 주인 노파 살해를 계획한다. 처음에는 엄청난 심리적 갈등 속에 방황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살해를 확신하게 된 우연한 일들이 반복된다. 우선 자주 가는 술집에서 옆자리에 앉은 대학생과 장교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다. 그들의 대화는 라스꼴리니코프가 죽이려고 하는 노파의 수전노적 성향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아주 진지하고 합리적인 것처럼 들렸다.



수도원으로 가게 될 노파의 돈으로 이루어지고 고쳐질 수 있는 수백, 수천 가지의 선한 사업과 계획들이 있단 말이야! 어쩌면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도 있고, 수십 가정들이 극빈과 분열, 파멸, 타락, 성병 치료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도 있어. 이 모든 일들이 노파의 돈으로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빼앗은 돈의 도움을 받아 훗날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 한 사람의 생명 덕분에 수천 명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고,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 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인데, 이건 간단한 계산 아닌가! 그 허약하고 어리석고 사악한 노파의 삶이 사회 전체의 무게에 비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그 노파의 삶은 바퀴벌레와 이[蝨]의 삶보다 더 나을 것이 없고, 어쩌면 그보다 더 못하다고도 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그 노파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갉아먹고 있잖아.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열린책들>



그들의 대화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논문의 내용과 흡사했다. 대학생과 청년 장교 역시 공공의 이익을 위해 노파를 죽이겠다는 정당성에 동의하고 있었다. 라스꼴리니코프는 이 말을 듣고 노파 살해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된다. 이에 더해 그들은 노파가 이종사촌 동생 라자베따를 착취하고 있음에 분노했다. 선량한 리자베따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것으로 모자라, 폭행까지 일삼는다고 했다. 정말 천인공노할 악인이 따로 없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된다고 했던가? 술집을 나와 센나야 광장을 지나는 길에 우연히 라자베따의 행동을 지켜보게 된다. 그녀는 광장 플리마켓에의 상인에게서 물건을 사고팔았는데, 특히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게 최대한 좋은 값을 쳐서 물건을 팔아 줄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다. 라스꼴리니코프는 리자베따가 오늘 저녁 7시에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오늘 저녁 7시에 살인을 하기로 결정했다.


소설 <죄와 벌>은 공리주의에 따른 사적 처벌을 주제로 하고 있다. 물론 도스토옙스키는 공리주의와 초인사상에 경도된 한 청년의 비극적 삶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한계와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사적 처벌은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나는 종종 법치주의의 한계를 목격할 때마다 울화가 치미는 경험을 한다. 친일 세력이 활개를 치고, 군사정권의 수뇌부들은 승승장구하며, 부정한 경제인은 자주 그것도 아주 쉽게 사면받는다. 불의한 정치인들은 초법적 권한으로 법망을 빠져나간다. 오죽하면 법꾸라지라는 말이 있겠는가?


3. 우리는 히어로를 가질 수 없는가?


최근에 어떤 장관은 ‘직접 민주주의를 하면 국가가 혼란에 빠진다’라는 말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의 주장의 요는 이렇다. 우리나라는 대의민주주의를 헌법적 기초로 하고 있으므로, 개개의 국민이 주권 행사를 시도한다면 헌법의 정신을 크게 손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직접 민주주의를 하면 국가가 혼란에 빠지는가? 직접 민주주의는 정말 헌법의 정신을 혼란하게 할 반헌법적 발상인가? 국가는 공정한 법의 집행자,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있지 주권을 독점할 권리는 없다. 우리 헌법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


그러나 국가 권력이 무능하거나 태만하거나 심지어 불의하기까지 하다면 그런 상황에 처한 다수의 국민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나는 법치주의의 협의의 해석을 지적하기 위해 최근 시청한 <살인자 o 난감>에 나오는 안내견 렉스의 안락사 문제를 잠시 생각해 보려 한다. 이 안내견은 두 번째 피살해자가 돌보는 개다. 이 개는 최초 이탕의 살해 도구였던 망치를 주인에게 물어다 줬다.. 이것을 계기로 주인은 이 망치가 첫 번째 살해에 쓰인 것을 알게 되고, 주인공 이탕을 협박해 매달 2백만 원(웹툰에서는 1백만 원)을 상납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것이 두 번째 살인이 일어나게 된 계기이다.


나는  개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살인 이후 개는 현장과 현장에 있는 시신들을 훼손 했다. 사람들은 마치  개가 살인이라도  것처럼 당연히 안락사시키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개는 살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개가 살인을 했다고 해도 개의 살인을 인간의 살인의 범주에 두고 판단하는 것은 과도한 부분이 있다. 사람을 물어 죽인 개는 살인견 일까 아니면 야생의 본능에 충실한 동물인 것일까? 나는  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할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가지 잣대로 판단할  없다는 얘기이다.


이처럼 평소 우리가 범죄를 바라보는 관점도 매우 협소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종종 어려서부터 성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유린당한 폭력의 당사자가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대상을 살해한 경우를 목격한다. 그리고 법적 제도의 한계로 범죄자에게 응당한 처벌을 하지 못해 고통받는 경우도 상당하고. 나는 지금 법의 제도가 포괄하지 못하는 처벌의 문제에 대해서 자위권을 발동할 수 없는가 생각해 보고 있다. 우리의 사법 제도는 사적 처벌은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제도 안에도 개인의 존엄권이나, 방어권, 정상 참작이라는 수단이 내재되어 있음을 고려해 봐야 한다. 현행 법도 억울하게 피해를 받은 인간은 존엄하며, 그 인간이 자기 존엄을 수호하고 위해 사적 제재를 했을 때 어느 정도 보호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많은 히어로 물들이 흥행하는 이유가 아닐까? 우리는 인간의 선한 의지(이탕), 하늘의 도움(살인 이후 아무런 증거도 남지 않는 것), 그리고 공권력을 넘어서는 정보력과 힘으로 국가가 해 주지 못하는 처벌을 대신해 주는 히어로들에게 열광한다. 국가는 공정한 법의 집행자,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있지만, 종종 국가권력이 무능하거나, 태만하거나, 심지어 불의하기까지 한 경우를 그냥 지켜봐야만 할 때 나는 묻고 싶었다. 소박한 정의를 위해 자신의 열정을 불태웠던 로빈이 이탕을 향해했던 말처럼.



“오천만 원, 록키산맥 보내줄 테니 나랑 함께 해보자.

이탕씨는 잘못한 게 없다. 인간쓰레기를 없앤 것뿐이다.”



이탕은 정말 잘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는 정말 인간쓰레기를 휴지통에 분리 수거한 것일까? 나는 정답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무엇인 정답인지 아닌지. 그리고 여기에 대한 답은 <죄와 벌>과 <살인자 o 난감>을 함께 본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고 싶다. 살인과 살인이 아닌 것과의 구분하기 힘든 나는 지금 껌이나 한 통 씹어야겠다. 그것이 풍선껌이든, 그냥 껌이든 상관없다. 그냥 풍선만 불어지면 되는 것 아닌가? 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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