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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Feb 19. 2024

죄와 벌_매혹된 인간

죄와 벌_매혹된 인간, 스비드리가일로프

죄와 벌_매혹된 인간, 스비드리가일로프


<죄와 벌: 법전을 읽듯 공부한 흔적들>


1. 타나토스(죽음)의 매혹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결코 두 번의 삶을 살 수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어제의 강물 위에 내 두 발을 담근다. 마치 이 강이 어제 있던 그대로인 것처럼. 죽은 사람들이 내 기억 속에서 금세 사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그들에 대한 생각이 희미해져 가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나를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늙어가면서 함께 사라져 간 나의 기억력의 탓도 있으리라. 나는 내 안에 있는 자아와 매일 이별한다. 마치 사랑했던 여인에게 이별을 통보받듯이 나는 매일 또 다른 나와 이별하고 만나고를 반복한다.


나의 자아도 그렇게 연속적이지 않은데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죽하랴? 나의 세포들이 매일 변화하며 죽음을 고하듯, 나를 사랑했던 많은 이들이 나를 떠나가고 대체되었다. 삶의 기억 속에서 영원할 거라 믿었던 무수한 사랑의 순간들은 아련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사랑의 추억이 잊힌다는 것도 매우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사랑의 기억과 사랑했던 이들이 사라져 갔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더욱 슬프다. 우리는 어쩌면 변화를 모르고 사는 게 아니라. 변화에 저항하며 우리의 삶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잊히는 것, 사라져 가는 것, 영원한 영점으로 수렴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은 도저히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형벌인지도 모른다. 필멸하는 운명 앞에서 울부짖었던 아킬레우스가 슬픈 까닭은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영웅마저도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인식 속에서 나는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인간의 숙명은 죽음과의 혹독한 대결이고, 끊임없이 대지를 비치는 햇살을 연모해야 하는 그런 시간들이다. 나는 죽음의 경계 앞에서 더 이상 거룩한 이상을 뇌까릴 수만은 없다. 나에게 경건함은 사치이다. 저주받은 골짜기와 곧 해가 지면 색깔을 잃어버릴 저 바위들을 보며 나는 죽음의 그림자를 목격한다. 그러나 언젠가 죽어야 한다면 나의 오늘은 찬란해야 한다. 나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빛난 순수와 진실을 되찾아야 마땅하다. 내 아내는 나를 진정한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음탕한 바람둥이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지만 나도 사랑할 줄 안다.


2. 나는 누구인가


내 이름은 스비드리가일로프다. 나는 귀족 출신으로, 젊은 시절 2년 간 기병대 장교로 복무했다. 전역 후 베쩨르부르크에서 어슬렁대다가 마르빠 뻬뜨로브나와 결혼해서 시골로 내려왔다. 그녀와 결혼하기 된 것은 내가 진 도박 빚 때문이다. 당시 채무를 갚을 능력이 없었는데 당시 마르빠 뻬드로브나가 내 보증을 서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녀는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영리하고 정직했다. 무엇보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 바로 돈을 가졌다. 그녀를 나를 사랑했지만 나를 소유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나 보다 나이가 많았고 무엇보다 입에서 냄새가 났으므로 결혼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밉보이게 되면 나는 또다시 감옥으로 가야 하는 처량한 신세였다.


질투심의 강한 그녀의 구애 끝에 우리는 서로 아래의 구두 협의에 이르게 된다.



1. 절대로 마르파 뻬뜨로브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그 여자의 남편으로 남겠다.

2. 그 여자의 허락 없이는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

3. 절대 고정된 정부를 갖지 않겠다.

4. 이에 대한 대가로 몸종을 건드리는 것은 허락해 주겠다.

5. 같은 계층의 여인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6. 만약 강렬하고 진지한 열정이 나를 사로잡게 되면, 반드시 아내에게 고백해야 한다.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열린책들>



사람들은 나를 야만적인 악당, 호색한 방탕아, 파렴치한이라고 욕한다. 그러나 나의 결혼 생활을 자세히 알게 된다면 쉽게 그렇게 욕하지만은 못할 것이다.


3. 합법적 결혼은 사랑의 종착역인가?


내가 싫어하는 인간말종 루쥔에게 한 젊은 사회주의자가 이런 얘기를 했다지? 간통, 특히 아내의 간통은 합법적인 결혼 생활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라고. 그것은 합법적인 결혼에 대한 수정이자 반항이므로 결단코 치욕적인 것이 아니라고. 언젠가 자신이 결혼하게 된다면 자신은 다른 이들이 얘기하는 간통을 오히려 기뻐하겠다고 말이야. 합법적인 결혼 관계에서 상대방을 속이게 되면 불쾌하다는 것쯤은 이해하지만, 그것은 여느 일반적인 연애의 상황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부정이 자유결혼에서처럼 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의미 초자 없으며, 그 이름조차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내가 뇌출혈로 죽기 전까지 그녀와 맺은 계약을 어긴 적이 없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진정한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죽여버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마르파 뻬뜨로브나가 왜 두냐를 가정교사로 집에 들일 모험을 결정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고, 천사 같은 성품을 지닌 그녀와 하루 종일 같은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면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나는 그녀를 처음 본 날 마음의 지진과 태풍을 경험했다. 그녀는 온통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녀에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의 옷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단정했다. 그녀의 두 뺨은 담홍색 빛을 머금고 있었고, 그녀의 착한 눈은 신비롭고 깊은 전설의 우물 속 같았다. 무엇보다 천진하고 착한 어린이의 앳된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질 날이 없었다.


나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를 단 한 번도 유혹한 적이 없었지만 나의 마음은 그녀에게 미혹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엽다는 생각은 우리를 위험으로 몰아갔다. 나는 그녀를 구해주고 싶었다. 가난한 살림에 어머니와 오빠를 위해 가정교사를 자처하고 나섰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고, 그녀에게 더 귀한 고귀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나는 그녀가 나의 연민이라는 그물에 걸릴 것을 기대하며 나만의 계획을 진행시켜 나갔다.


두냐야 말로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인간임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시골에서 몸종으로 데려온 빠라샤라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검은 눈동자에 정말 예쁜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외롭고 힘들었는지 마당에서 울부짖으며 소리를 질러대는 소동이 있었다. 그날 두냐가 은밀히 나를 찾아와 빛나는 눈으로 가련한 빠라샤를 가만히 내버려 둬 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그게 우리 사이의 첫 번째 대화였다. 그녀는 나에게 교훈, 설득, 애원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청을 승낙하는 듯했으나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우 기뻤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어느 날 나는 내가 마련할 수 있는 전 재산(3천)을 그녀에게 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뻬쩨르부르크로라도 도망치자고 말했다. 영원히 사랑할 것과 행복하게 해 줄 것을 맹약하면서. 그러나 두냐 같이 착하고 이성적인 여성이 유부남인 나의 고백을 받아들일 리 없다. 오히려 나와의 관계를 의심한 아내의 질투로 두냐는 가정교사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게 끝이 아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마르파 뻬뜨로브나는 동네의 주요 인사들뿐 아니라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두냐가 나를 유혹했다고 소문을 확산시켰다. 모든 것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내 아내가 루쥔이라는 비열한 자를 데려다가 두냐와 결혼시킬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과 분노 앞에 무너져 내렸다.  


만약 두냐가 마르파 뻬뜨로브나를 베어 버리거든, 독살한 뒤 결혼하자고 했다면 나는 정말 그 끔찍한 살인을 실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모든 것은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우연이었을까? 마르파 뻬뜨로브나는 어느 날 포도주를 마시고 목욕을 하던 도중 뇌출혈로 사망했다.


4. 아름다움을 탐한 죄


나는 곧 결혼할 예정이다. 아내는 이제 죽었고, 귀족 가문의 일원인 나는 이제 어느 정도의 재산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내 나이는 이제 막 쉰을 넘었지만 나는 열여섯도 안된 아가씨와 결혼할 예정이다. 그 아가씨가 열여섯도 안되었다는 것으로 나를 비난하려고 한다면 해 봐라. 그러나 도덕적으로 나를 비난할 지언 정 내가 그 아가씨와 결혼하면 안 된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맞다. 나는 욕정에 빠진 나머지 피지도 않은 꽃봉오리와 같은 그녀를 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두 볼은 아침노을처럼 새빨갛다. 맑은 눈동자, 수줍음 부끄러움의 눈물까지, 저는 그 모든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아이와는 두 번 정도 얘기해 보았다. 나는 분명 그녀의 얼굴에서 시스티나의 마돈나의 환상적인 얼굴과 비애에 가득 찬 유로지비의 얼굴을 동시에 보았다. 혹시 터무니없는 나이 차이를 무시하는 나에게 색욕에만 눈이 멀었다고 욕해도 좋다. 뭐가 어떤가?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이 결혼을 성사시킬 생각이다. 하하! 라스꼴리니코프는 내게 그렇게 도덕률만 주장하겠지? 용서해라. 나는 원래 죄 많은 인간이니까.   


나는 오늘 밤 두냐의 오빠 라스꼴리니코프에게 미국으로 도망치라고 말했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돈이 없다면 내가 모든 여비를 감당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ㄴ는 나를 무슨 벌레 보듯 혐오스럽게 바라봤다. 그는 도덕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거나,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생각했겠지? 그런 그를 보며 저는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렸다.


“그럴 거면 권총으로 자살하세요. 왜요, 그러기는 싫은가요?”


내가 그에게 야만적인 악당, 호색한 방탕아, 파렴치한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 같다. 집으로 오는 길에 그는 나를 따라왔다. 이제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 라나 어쩐다나. 이제 그는 거의 반미치광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건가? 라스꼴리니꼬프와 센나야 광장 근처 다리에서 얘기하는 동안 두냐가 나타났다.


나는 그녀와 함께하고 싶은 욕심에 그녀의 오빠의 비밀을 손아귀에 넣었으니 지금 같이 얘기해야 한다고 마음에도 없는 협박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를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냐만 두려웠던 게 아니다. 나의 심장도 쿵쾅거렸으며, 숨이 위턱까지 차 올랐다. 내가 양심 없는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으니 앞서 가라 한다. 그녀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그녀가 두렵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녀의 오빠가 자신의 논문 내용이 지시하는 공리주의와 초인사상에 따라 노파와 리자베타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알려줬다. 라스꼴리니코프의 정신 상태는 러시아 인들이 흔히 그렇듯 광활하고 무질서한 경향이 있다고 말해줬다. 그는 스스로 비범하다고 생각했으나, 특별한 천재성도 없이 대담했던 재앙과도 같은 영혼이라고도 말해줬다. 그녀는 이 말을 듣고 믿지 않으려 했으나 잠시 실신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녀에게 오빠를 구해 내자고 했다. 원한다면 그를 외국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내게는 충분한 돈이 있으니, 사흘 안에 표를 구할 수 있다고. 무엇보다 오빠가 살인을 한 것도 앞으로 선한 일을 많이 한다면 속죄될 수 있으니까 많이 염려하지는 말자고 위로했다. 오히려 이번 일로 전화위복의 기회를 만든다면 오빠가 정말로 위대한 사람이 되지 않겠냐고. 나는 진심이었다. 그녀만 원한다면 당장 여권을 준비하고, 이런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고용하겠다고 했다. 그녀와 어머니의 여권도…. 그리고 또 쓸데없는 얘기를 내뱉고 말았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무한히 사랑한다고….


아~ 나는 얼마나 무디고 어리석은 인간인가? 내가 진심 어린 말로 그녀에게 다가가는 동안 그녀는 내게서 떨어져서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던 것이다.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하고 소리쳤다. 나를 비열하다고, 폭행이라고 소리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갑자기 주머니에서 연발 권총을 꺼내 안전핀을 뽑고 작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죽여버리겠다며. 내가 아내를 독살한 것을 안단다. 내가 살인자라며 비열한 나를 죽일 수 있다고 했다. 두냐는 권총을 들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린 아랫입술을 바들바들 떨면서 커다란 검은 눈동자로 나를 쏘아봤다. 미쳤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를 이전에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반짝인 불꽃은 나를 태워버릴 총알이 되어 내 머리를 스쳤다.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피가 흘렀다. 살짝 스친 것뿐이지만 그녀는 놀라서 총을 던져 버렸다.


나는 그때 무언가 내 심장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죽음의 공포가 주는 중압감은 아니었다. 무언가 더 슬프고 암울한 다른 감정, 나도 도저히 규정할 수 없는 어떤 감정으로부터의 해방 같은 것이었다. 나는 두냐에게 다가가 조용히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지만, 온몸을 부르르 떨며 나를 외면했다. 그녀에게 나를 사랑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놓아줘, 놓아줘, 아니, 결코” 나는 절망적이고 허약한 미소를 머금고 두냐가 버린 권총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 속엔 아직 두발의 총알과 한 알의 뇌관이 남아있었다.


5.  덥고 암울했던 밤


그날 밤은 몹시 무덥고 암울했다. 사방에서 먹구름이 몰려와 비를 뿌렸다. 나는 소냐를 만나러 갔다. 나는 어쩌면 미국으로 떠날지도 모르겠다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여동생과 남동생은 적절한 보호 기관에 맡겨졌고, 그곳에 지불해야 하는 돈을 각각의 명의로 영수증 받고 믿음 만한 곳에 맡겨 놓았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 대비해서 영수증들과 3천 루블에 상당하는 5% 이자의 채권 석장을 소냐에게 건네줬다. 소냐는 3천 루블은 사양했다. 하지만 나는 소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라스꼴리니꼬프에게 필요할 것이니 사절하지 말라고 했다.


11시경 나는 돌아오는 길에 채권과 은화 1만 5천 루블의 돈을 가져와 약혼녀에게 선물로 받아달라며 전해줬다. 그녀는 환호성을 지르며 놀라워했다. 이 돈이 그녀의 어머니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이 모든 걱정을 뒤로한 채 그녀의 집을 나섰다.


나는 자정 무렵 거무스름한 외관의 목조 호텔로 가서 공기가 탁한 비좁은 방 하나에 투숙했다. 송아지 고기와 차를 룸 서비스로 주문했다. 비에 젖은 몸을 녹이기 위해 따뜻한 찻잔을 한숨에 들이 겼다. 그러나 입맛이 없어 송아지 고기를 한 조각도 먹지 못했다. 비가 온다. 아니 폭풍우다. 나는 평생 물을 싫어했다. 풍경화에 나오는 물조차 싫어할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라스꼴리니코프와 두냐를 생각했다. 나에게 총을 쏘고 죽은 사람처럼 서서 나를 바라보던 그녀를 생각만 해도 그녀가 불쌍해져서 나의 심장이 죄어드는 것만 같았다.


그날 밤 오한에 덜덜 떨었다. 그러 던 중 어떤 환영을 보았다. 꽃밭, 영국식 목조 가옥, 장미꽃이 만발한 현관…. 선선하고 미풍이 불어오는 방안에는 하얀 비단옷을 입고 장미 화한을 쓴 물에 젖은 금발의 소녀가 관속에 누워있었다. 창백한 입술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한없는 슬픔과 하소연이 서려있었다. 열네 살 소녀는 능욕을 당해 찢기고 상처를 입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또 다른 꿈속에서 다 헤어진 걸레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창백한 얼굴에 추위로 인해 온몸이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아이의 옷을 벗긴 다음 침대에 눕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불을 꼭 덮어줬다. 그러나 나는 아이의 얼굴에서 왠지 이상한 모습을 발견했다. 아이의 교활한 눈썹은 마치 나를 유혹하는 듯했다. 아이의 웃음에서 나는 무언가 뻔뻔하고 도발적이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음탕함이었다. 바람기 있는 프랑스 창녀의 뻔뻔스러운 얼굴이었다.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린 나는 온몸이 아파왔다. 나는 총을 집어 들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우윳빛 짙은 안개가 도시 위를 뒤덮고 있었다. 거리는 온통 비에 젖어 있었고 단 한 명도 다니지 않았다. 음울하고 더러운 도시의 뒷골목은 추위와 눅눅함이 더해 내 몸은 뼛속까지 한기를 느꼈다.


목조 건물의 끝나는 지점에는 육중한 소방대 건물이 있었다. 그 닫힌 거대한 정문에는 옛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투구와 같은 청동 모자를 쓴 키 작은 사내가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자신의 명예의 상이자 사랑하는 브뤼세이스를 잃고 아킬레우스는 분노했다. 그가 분노했던 것은 단지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비록 반신반인으로 태어났으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슬펐다. 무엇보다 이번 트로이 전쟁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필멸할 운명 앞에 슬피 울었던 아킬레우스를 보며 나는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 권총으로 두냐가 나를 쐈을 때 나는 이미 죽은 목숨과 다름없었다. 나의 진심, 나의 사랑은 이미 능욕당하고, 상처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이다. 두냐도 나도 이 마지막 남은 한 발의 뇌관으로 쏘아질 두 발의 총알에 희생되었는지도 모른다.



에필로그



나는 이 자전거 타는 소녀의 두 눈에 담긴 것을 소유하지 않는 이상 소녀 역시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소녀의 삶 전체가 나를 욕망으로 가득 채웠다. 그 욕망은 실현될 수 없다고 느껴졌기에 비탄을 자아내는 욕망이었지만 지금까지 내 삶이었던 것이 돌연 내 삶이기를 멈추고 이제 내 앞에 펼쳐진 조그마한 공간에 지나지 않게 됐기에 희열을 자아내는 욕망이기도 했다. 나는 이 작은 공간을 채우기를 열망했다. 소녀들의 삶으로 이루어진 이 공간은 나에게 자아를 연장하는, 자아를 증식하는 행복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셸 프로스트, 민음사>



<죄와 벌 하편> 전반을 연결하는 인물은 스비드리가일로프이다. 이 소설을 4번 이상 정독했지만 그동안 이 인물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큰 관심이 없었다. 나도 그저 주인공의 프레임에 갇혀 이 사람을 두냐를 곤경에 빠뜨린 야만적인 악당, 호색한 방탕아, 파렴치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묘사된 장면들을 순차적으로 정독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래서 이런 글을 써내려 갔는지도 모른다.


그가 욕망한 것은 단지 아름다운 여인 만이었을까? 그가 동경한 것은 신처럼 되고 싶은 유혹이 아니었을까? 하늘과 땅의 경계를 뛰어넘으려는 유혹, 초인이 되려는 유혹, 신이 되어 보려는 유혹 말이다. 그는 꽃처럼 피어오르는 여인들을 욕망하며 자신의 자아를 연장하고, 증식하는 행복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녀로 인해 그는 불타올랐고 이런저런 유혹으로 들끓는 위험천만한 모험을 즐겼다. 그에게서 여인의 아름다움은 모든 논리적, 윤리적 인과관계를 무너뜨리고, 그 바깥의 모든 납득할 만한 연관성을 뛰어넘어 감정을 폭발시킨다. 도스토옙스키가 <백치>에서 얘기한 것처럼 ‘아름다움이야 말로 수수께끼’이다.


두냐를 향한 그의 사랑은 그가 연인이라는 존재에게 가지고 있던 애착이 일시적으로 드러난 형태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우리는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사랑한 것은 그녀의 얼굴에 잠깐 비친 여명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를 통해 우리의 자아가 확장되고 성장되었다면 그 모든 아픔도 가치 있다. 진정한 사랑은 그 행복한 순간의 추억들뿐 아니라 그 아픔까지도 받아들이게 될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늘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비극적 죽음이 너무 아프지만 아름답다. 오늘 밤은 그가 고뇌한 사랑의 열병으로 인해 많이 나도 많이 춥고 아플 것 같다.


<참고 문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셸 프로스트, 민음사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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