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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Feb 05. 2024

죄와 벌_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사형으로부터 부활을 경험하다

1.   사형으로부터 부활을 경험하다


루이 필립 왕을 폐위시킨 프랑스의 2월 혁명은 러시아 황실을 긴장시켰다.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정권 유지를 위해 감시와 검열을 강화했다. 심지어 위험한 서구 사상의 유입을 막기 위해 대학의 철학 과목을 폐강하고 심리학, 논리학, 심리학은 신학과로 강제 통합하는 무리수를 뒀다.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페트라솁스키 서클> 사건이 일어났다. 폐트라솁스키는 페테르부르크 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외부에서 통번역을 하던 관리였다. 프랑스식 사회주의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몇몇 지인들을 집에 불러 토론하는 모임을 매주 열었다. 당시 스물여덟 살의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도 이 서클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당국의 수사로 1849년 4월 23일 새벽 내란 음모죄로 일망타진된다.


체포 후 6개월 정도 지나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고 마침내 형이 확정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4년 징역 및 이후 사병으로 복무할 것이 언도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상하게 사형 집행에 대한 명령을 하달한다. 그것이 그 유명한 ‘가짜 사형식’이다. 지식인들의 언론 행위를 두려워한 황제는 그들을 자기편으로 포섭하고 싶었다. 그래서 죄수들에게 사형을 선고해서 잔뜩 겁을 준 다음 마지막 순간에 감형시켜 자신의 전능한 힘과 자비심을 보여주는 유치한 방식으로 정치범들을 회유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사형 집행 장면, 출처: 위키피디아>


그 해 겨울, 사형 선고를 받은 수인들은 연병장으로 이송되었다. 짜인 각본 대로 사형수들은 총을 겨눈 사수들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황제의 전령이 극적으로 달려와 형집행 정지를 외치고 사면을 명하는 선고문이 낭독되었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코미디가 따로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도스토옙스키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2.   삶에의 의지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아내 안나가 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나들>을 보면 그가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사면에 진심으로 감사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그는 그 사건 이후 마치 죽음에서 부활하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유형 생활에서 의미를 찾았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그는 참 순진한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얘기했듯 그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앞서 가서 봄’ 으로써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숙고했던 것 아닐까?  그는 작품 전반에 그 삶에 대한 의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어디서 읽었더라? 사형 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겨우 자기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은 절벽 위의 좁은 장소에서 심연,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평생, 1천 년 동안, 아니 영원히 1 아르신밖에 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했다지! 살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든, 살 수 있기만 하다면…… -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이 글만 보면 그는 정말로 살고 싶었던 것 같다. 높은 절벽이라는 극단적인 공간을 상정해 놓고 0.7 미터제곱의 좁은 공간에서 영원한 괴로움과 고독 속에서라도 살겠다는 그 의지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는 진짜 살고 싶어 했다.


3.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요즘 단테 신곡의 지옥편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주변 지인들이 내게 무슨 일 있냐고 조심스레 안부를 묻는다. 나는 사실 지옥 같은 삶을 졸업한 지가 오래 지났는데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옥 구경을 잠시 중단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불행한 경험은 우리를 주눅 들게 한다. 그런 경험은 정말 최악이다. 다양한 형태의 불행들이 있다. 가족의 죽음, 질병, 사고, 파산, 천재지변 등과 같은 불행은 우리 삶을 순식간에 나락으로 끌고 간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녹아 없어지고, 파괴되더라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 자신(self)이다. 우리는 평소에 자기 자신에 대한 주의와 관심은 놓치고 산다. 나만해도 온통 관심은 물질적인 욕망과 눈앞에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주변의 상황이 아닌 자기 자신을 지키는 내적 능력에 집중해야 한다. 삶의 전투에서 나 자신은 지휘통제센터와 같다. 지휘통제실이 무너지면 인생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삶이 불행하다 느껴지던 시절 행복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돼야 하는지를 찾아 온갖 책들을 찾아 읽었다. 수많은 행복론을 답습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은 온갖 방법으로 행복을 설파하지만, 그것은 아무도 본 적이 없고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는 ‘파랑새’ 였다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삶이 불행한 것이라는 비관론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삶에는 기쁨도 존재한다. 그러나 기쁨은 추구할 수 있는 것도, 바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행불행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시도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행복은 결코 목표가 되어선 안되고, 될 수도 없다. 그것은 오로지 결과로써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일 뿐이다. 도대체 우리 삶에서 어떤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고 어떤 순간이 불행한 순간이란 말인가?


4.   새롭게 시작하는 인간에 대한 이상


독일의 대표적 시인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

Ein gutter Mensch in
seinem dunklen Drange
Ist sich des rechten Weges wohl bewuBt


위 글을 읽어보면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이란 표현’이 좀 이상하다. 어떻게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인간을 선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경기도 여주에 여백서원과 괴테하우스를 지우신 전영애 선생님(나는 이분을 매우 흠모한다)의 강의를 들어보니 이것을 번역의 문제로 해결하려는 학자가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는 ‘선한 인간은, 때로 어두운 충동에 사로 잡힐지라도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문제제기 했단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파우스트 할머니'의 설명을 들어보면, 위 원문에는 어디에도 쉼표가 없으므로 그것은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것이다. 엄격한 괴테가 그런식으로 글을 썼을리 없다고 단언하셨다. 그러므로 자신처럼 직역해야 마땅하다고 강변하셨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하신다.


“인간은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할 수 없다. 인간은 그가 인간인한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지칭하는 선한 인간은 보통의 인간이 처절하게 악을 하나하나 이기고 결국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는 인간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는 이 설명에 완전히 설득되었다. 나는 청소년기 이후 30년이 넘는 시간을 ‘왜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존재로 살아왔다. 이제 인생의 정점을 지나면서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내가 왜 세상에 왔는지를 질문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것에 대해 답해줄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모가 되어보니 만약 부모님이 살아계셨다 해도 이 질문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나는 세상에 아무런 이유 없이 던져진 존재이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를 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답할 의무만이 존재한다.


행복과 불행도 이와 같다. 세상에는 순도 100%의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이 주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쇼펜하우어가 얘기하는 권태의 상태가 아닐까? 그의 말대로 인생은 권태와 쾌락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 인생은 늘 알 수 없는 심연 위에서 매달려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외줄 같은 것이다. 그 줄 위에서 어떤 곡예를 할 것인지는 오직 나에게 달렸다. 과거가 어찌 되었든 미래가 어찌 될 거이든 그것은 나의 통제권 밖에 있는 일이다. 오직 '지금 여기' 내게 열려 있는 가능성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우리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에 각자에게 달렸다.


나는 단순한 축구 경기 속에서도 지옥(소돔)의 이상과 천국(마돈나)의 이상을 함께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 주말에 봤던 손흥민 선수의 멋진 골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호주에 끌려가던 전반전 나는 선수들의 분투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를 숨죽여 지켜봤다. 두 팀은 정말 사력을 다했다. 진심으로 볼을 놓고 싸웠다. 그러나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엉퀴며 뛰었고, 기어 다녔고, 넘어졌고, 압박했고 또 쓰러져 갔다. 그리고 마지막 추가시간에 분노한 아킬레우스 갔있던 손흥민 선수가 극적인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그것을 황소 같은 황희찬 선수가 환상적인 킥으로 골망을 갈랐다. 승부는 연장전으로 미뤄졌다.


그 순간 나는 우리 선수들을 진심으로 존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희망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을 자신을 계속 증명하려 했고, 빈틈없는 상대의 진영에 작은 크랙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연장 전반 13분 우리의 영웅 손흥민 선수는 우람하고 장대해 마치 그리스 신화의 신과 같아 보였던 상대 수비수들을 가뿐히 가로지르는 눈부신 역전 프리킥 골을 성공시켰다. 이번에는 호주가 세계 최정상급 상대들이 즐비한 강팀에게 패배를 맞보는 순간을 맞았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승리했다. 우리 선수들은 영광의 축배를 향유할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그렇다고 해서 경기에서 패배한 상대편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호주 선수들은 전 후반 최선을 다했고, 무섭게 공격했으며, 시종일관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전사의 위엄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젊은 선수들은 이번 경기의 아쉬움을 배움과 성장의 기회로 삼았을 것이다. 그들이 나무처럼 성장해 나간다면 언젠가 그들은 똑같은 패배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공은 둥글다. 언젠가 그들도 우리처럼 승리의 보상을 나눠가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패배는 상대편 선수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왜냐하면 신과 깉은 손흥민 선수가 너무 뛰어난 것뿐이니까. 그저  ‘위대한 선수가, 위대한 일을 한 것’ 뿐이다. 오늘만은 이 경기를 관전했던 올림푸스의 신들도 위대한 의지를 가진 영웅들을 바라보며 한껏 부러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행동으로든 인내로든
더 나아지지 않는 상황이란 없다."
<괴테>


우리는 운명를 바꿀 수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이기든지 지든지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의지가 있는 한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고통이 우는 사자와 같이 나에게 다가와도 가혹한 운명 앞에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로울 때도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행동할 것이다. 나의 존엄을 위해 싸울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는 것를 잘 알기에.


그리고 도스토옙스키가 평생 그랬듯 우리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죽지 않는 존재라면 우리는 천상의 신들처럼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마시며 시간이나 죽이고 있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 삶이 유한하고 내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적인 것을 자각한다면 우리는 이 한정적인 시간 동안 무엇이라도 해야하는 존재임을 자각해야한다. 죽음은 곧 마지막 기회라는 상징이다. 삶이란 가능조건에 대해 질문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삶에 담담하게 대답하고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마치 시한부 인생에게 두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두번째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나가겠다고 다짐할 것이다. 이제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코프가 읊조린 아래 대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겠다.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지금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할 것이다.
살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든, 살 수 있기만 하다면
하면서....




<참고 문헌>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도스또예프스끼,이대우 역, 열린책들

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 석영중, 열린책들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안나 도스토옙스키, 최호정 역, 엑스북스

매핑 도스토옙스키, 석영중, 열린책들

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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