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풀거리며 그녀가 달려온다. 방금 목욕탕을 다녀왔는지, 긴 머릿결이 덜 말라 물기가 어려 있다.
"어, 쟤네 집이 여기가 아닌 데, 왜 이곳에서 보이지?"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이쁜 애 셋 중에서도 가장 예뻤던 애가 방금 내 눈앞에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맞은편 2층 집으로 올라가는 게 아닌가!
그런데, 아니다. 하지만 너무 닮았다. 그 애는 형 또래 애였다. 덕택으로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소환하고는, 새로 이사 온 그 애가 정말 그랬으면 하는 환상을 꾸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조차 힘든 시절, 그러니까 과밀 학급이란 개념조차 없던 때에, 우리 학급에는 80여 명이 한 반에서 수업을 받았다. 남녀를 뒤섞어 놓기는 했지만, 짝은 동성으로 앉혔다. 머리칼이 곧고 길어 허리까지 내려왔던 그 애는, 하필(?) 내 바로 앞자리에 배치된 갓이었다. 점심시간이면 그 긴 머리를 연신 귀 옆으로 넘기면서 줄넘기 놀이를 하던 그 애는, 정말 여신처럼 보였다. 세상이 바뀌고 가정 형편이 괜찮았다면, 지금의 전 oo쯤은 되지 않았을까?
어쨌든, 시간이 흘러 우리는 남녀 중학으로 배치되어 떠나가고, 그리고는 한동안 잊혔다.
2.
대학 1학년 때였다. 학교 가는 버스를 타려고 버스 정류장에 닿던 순간, 분명히 그녀였다. 이제는 머리를 귀를 덮을 정도로만 기르고 있었지만, 틀림없는 그 애였다.
"어떡하지? 날 알아볼까?"
"못 알아본다면?"
그렇게 그날은 두근거리기만 하다가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일단 이 시간대에 어디를 간다면, 다음 기회에 또 만날 확률은 확보 한 셈이다. 그리고는 며칠 뒤, 나는 우연히도(?) 그녀를 다시 목격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녀를 따라 몰래 어디로 향하는지 따라 가 보기로 했다. 알아채지 못하게 손잡이를 잡고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성공적으로 그녀가 내리는 곳을 따라잡았다. 입장하는 곳이 정확히 어딘 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사회복지 관련 일터였던 것 같다.
'오늘은 이 정도 확인하고 다움에는...'
그리고는 또 얼마간이 지나, 그녀가 여전히 버스 승강장 앞에 있는 모습을 보았다.
3.
'이번에는' 하고 가까이 가는 순간, 그녀의 어머니로 짐작되는 나이 든 여자가 곁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구!"
재빨리 뒷걸음으로 그 공간을 얼른 비켜났다. 요즘 같으면 참 우스운 광경이겠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세월의 두께를 감추려는 듯, 정말 화장을 짙게 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왜 어머니와?..."
아마도 그녀와 어머니는 동일한 이동 경로상에 일터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후로도 가끔씩 그런 모습을 목격했지만, 내가 출연하는 장면은 거기까지였다. 추억은 가슴속에 묻어 두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처럼, 차라리 그게 나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옷차림 따위의 외형으로 사람을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그녀도 어릴 때의 청순한 모습과는 달리, 짙은 화장 아래 꾸며진 외관이 무척 낯설었던 건 사실이다.(이로써 나는 자기 합리화를 향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긴 머리칼을 나부끼며 뛰어놀던 그 모습만 간직했다면, 평생 아름다운 영상으로만 남았을 텐 데 말이다. 지금 아마 진정한 우연으로 길에서 마주쳐도, 서로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더 실망스러운 이미지를 멈추고 두고두고 긴 머리 소녀로 남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글을 지금의 아내가 본다면 어쩌지?
[지도 그런 추억 하나쯤은 갖고 았을 텐 데 뭘!..... 에구, 뭐가 날아 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