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번데기가 나무 둥지 모형 콘크리트 기둥에 붙어 있다. "무얼 먹고 버티면서 매미로 완전히 탈피하는 것일까?" 인터넷을 뒤져봐도 매미는 유충일 때 땅 밑에서 나무뿌리 수액을 먹고, 완전히 매미로 변태 했을 때에도 나무껍질 수분을 취하며 산다는 것 외에는 번데기 시절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렇다면 굼벵이 때 축적한 영양분으로 매달려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암튼 이게 영양분 공급과는 관계없는 시기라 거기에 붙어있을 것이다. 콘크리트 기둥에도 몸을 붙인 걸 보면, 천적에게 잡아 먹히지만 않으면 부착물에는 관계없을 듯하다. 그것이 인공물을 자연적 나무둥지로 착각해 달라붙은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만약 번데기에도 영양분 공급이 필요하다면, 그 번데기는 자기가 붙을 숙주를 착각으로 잘못 선택한 것이다. 나무와 콘크리트의 질감을 오인해 엉뚱한 선택을 할 리가 만무할 텐 데 말이다. 그 껍질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미 매미가 되어 빠져 나가고 껍질만 남은 듯하다. 잠시 그 상태에서도 먹이 섭취가 필요할 것이라는 건 나의 착오일 뿐이라는 걸 가르쳐 준다.
가상에 들러붙은 것은 실재를 가린다. 저기 매미가 콘크리트 구조물을 나무처럼 착각하고 들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질을 모른 처사이다. 만약 그 시기에는 지지할 고착물만 되면 무엇이든 가릴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면, 그저 그럴 수 있다는 개방성을 부여한다. '무엇이 되었든...' 그러나 이를 몰랐거나, 적어도 우리 상식선내에서 판단할 때에는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한다. 그런데 안다고 하는 것이 다 일까? 모르고 접근했을 때에는 의문이 달라붙었다. 그런데 아는 순간에는 별 달라붙는 게 없다. 귀찮게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아 좋기는 하지만, '이미 갖추어져 있음'이라는 세계와의 차단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 사태를 모름으로써 매미라는 녀석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리되면 다음번에는 동일한 사태를 만나더라도 무심하게 지나치게 될 것이다. 또는 아는 것이라도 범위를 넘어서면 다른 의문이 생기기는 한다. 7년을 땅속에서 버텨 고작 길어봐야 2주 정도를 살다가는 매미의 삶은 의혹 투성이다. 그럴 것 같으면 최소 10년 이상은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이 알 수 없는 것에서 매미의 실재적 삶이 있을 것인데, 정작 콘크리트 기둥에 붙어 있느냐는 것에 궁금해했으니 근본적 물음이 잘못된 듯하다. 피상적 앎에만 익속해 있으니 어느 정도로만 인식하고 얼른 의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다. 아마도 매미의 이런 역설적인 일생은 누구도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얼른 '자연의 섭리'같은 것으로 던져버린다. 맞긴 맞는 말이다.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모르는 것이 질문을 개방한다. 아는 것이 무지가 된다. 한 번 폐쇄 속으로 밀려 들어간 것은 좀처럼 문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그 경계를 허물어 뜨리게 한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모르는 게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