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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스트쪼 Nov 22. 2024

공개수업 다녀왔니?


바쁘신 와중에도 귀한 시간 내어 공개수업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전 거북이 아들 찬이의 공개 수업이 진행되었다. 공개 수업의 ‘공개’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이들의 수업 모습을 공개하는 자리지만 엄마들의 모습도 짜잔 공개되는 자리이다. 찬이는 벌써 4학년. 언제 샀는지도 모를 철 지난 명품 가방에 명품 옷 흉내라도 내보겠다며 산 손바닥 만한 스카프 따위 매는 코흘리개 하수 엄마는 이제 없다. 최대한 꾸안꾸. 좁은 동네에서 눈곱만 떼고 커피숍에 앉아 오늘은 어느 집 자식이 더 게으른 자식이었는지 총알 없는 전쟁을 하는 사이에 짙은 화장과 정장은 피에로처럼 우습기만 할 뿐이다. 나의 모습은 그저 선생님께 아들과는 영 다르시네를 각인시킬 정도로 단정하고 우아하고 점잖고 단아하면 된다.


 세상 마음 넓은 엄마 가면을 쓰고 교실로 입장한다. 하지만 나의 아들을 찾는 눈은 매의 눈보다 매섭다. 포착. 나의 거북이는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듯 나의 예상 그대로 학생 3쯤의 역할로 우두커니 앉아 있다. 짜식. 그래도 키는 좀 크네. 고슴도치 어미가 슬며시 웃는 순간이다. 이런 걸로 밖에는 다른 친구들을 이길 무기가 없으니 일단 이기는 카드를 먼저 쓰고 기분을 올려본다. 좋아진 기분에 옆에 앉은 친구들부터 스캔하기 시작한다. 도연이. 민규. 우진이. 대충 이름과 얼굴의 매치가 성사되며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순간.

응? 현우? 현우...?

모둠으로 놔눠 앉은자리에 내 아들 찬이와 대각선 맞은편으로 현우가 앉아 있다. 현우가 누구인가. 거북이 마음에 가시를 심어 놓고 눈물짓게 해 선생님과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깊은 고민을 나누게 했던 번뇌의 그 현우가 아닌가. 얼마 전까지 찬이에게 현우와의 안부를 물었을 때 분명 이야기를 하지 않는 서먹한 상태라고 했는데. 같은 모둠에 앉아있다고? 선생님께서 그 친구의 부모님에게까지 전달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어서 분명히 따로 분리시켜놓겠다 하셨는데 공개 수업이 진행되는 이 시기에 같은 모둠이라니. 내 머릿속은 적색경고가 삐뽀삐뽀 울리고 뇌에서는 상황 처리가 신속히 진행되지 않는다.(선생님도 다 계획이 있으시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가득 안은 애매한 눈으로 거북이를 본다. 눈이 마주친다. 씩. 웃는 녀석의 마음을 알 길이 없다. 괜찮은 건가?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른 척 껄끄럽게 지낸다고 말했는데.


 거북이는 엄마가 자신에게 예민한 것을 안다.(그래서 더 말을 아끼는 것일지도) 교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엄마의 눈이 어디를 향하는지 눈치챈 거북이는 엄마 안정시키기에 돌입한다. 우연히 당첨된 모듬장 배지를 어깨에 한움쿰 올리고 긴장 된 손으로 모둠원에게 과제 수행 지를 의젓한 척 돌린다. 도연이, 민규, 현우, 우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돌리지만 현우에게 내미는 손은 뭔가 조금 어색하다는 것은 엄마인 나만 느끼는 걸까.

과제를 발표하기 위해 모둠원끼리 의논을 한다. 50개가 넘는 눈이 주시하고 있으니 그 순간만큼은 모둠원 모두 다 친한 친구다. 현우와 거북이 사이에도 뭔가 미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감돌지만 다른 친구들의 웃고 떠드는 공기에 묻혀 스리슬쩍 지나간다. 한두 마디 건네며 웃기도. 아이들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가 맞지만 거북이와 현우의 경우는 일방적인 괴롭힘이었고 한쪽이 심하게 마음을 다친 상태인데 칼로 물을 베기란 쉽지 않을 터. 거북이도 그렇지만 현우도 어색한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른의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어땠을까. 피해자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를 한다. 가해자는 감사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징계를 받는다. 그럼 이 사건 이후로 두 사람은 같은 팀에서 일할 수 있을까. 같은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나. 내가 피해자라면 난 못할 것 같은데.     

"아이들은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 그들은 우리의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닉 스타비스     

 둘은 아이와 어른의 그쯤 어디인 것 같았다. 거북이의 눈빛을 보면 아직 완전히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친구가 손 내밀면 잡아줄 용의가 있는. 현우의 눈빛은.(내가 가늠하기 어렵다)

 내 거북이도 순박한 아이지만 현우도 천진난만한 아이이지 않나. 아직 순수하고 맑은. 나의 찬이도 우리 집 보물이지만 현우도 그 집의 보물이다. 내가 미워해도 되는가. 남의 집 귀한 보물을. 난 어른이지 않나. 용서시키고, 화해시키고, 비 온 뒤 땅이 굳을 수 있도록. 이것이 어른이 해야 하는 일이지 않나. 하지만 현우를 보고도 눈빛이 흔들리는 나는 어린아이 마음 하나 가늠하지 못하는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일까. 나를 자책하는 그 순간 현우의 엄마와 시선이 얽힌다. 어색함에 몸 둘 바를 모르는 0.1초가 지나간다. 죄송하다며 연신 사과를 하던 전화기 속의 현우 엄마의 목소리와 지금의 눈빛이 겹쳐진다. 그녀의 눈빛은 전화기의 목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부모란 무엇일까. 자식은 무엇일까. 그녀도 나도 이런 무수한 일을 겪으며 부모가 되어가는 것일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심 거북이가 친구들과 잘 못 섞이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더라도, 그렇더라도 무릎에 힘 꽉 주고 아이에게 ‘네가 자랑스럽다’ 모나리자 미소를 날려주어야지 하며 마음의 고삐를 바투 쥐고 왔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었다’라는 것이다. 역시 부모는 이 세상 제일의 걱정대장이다.


 뭔가 어설프고 귀엽고 풋내 나는 공개 수업이 끝이 났다. 한두 번 와본 것도 아니니 별로 신기할 것도 감동받을 것도 없지만 역시 안 오면 섭섭한 시간이다. 책상 서랍에 뭐가 들어가 있는지 사물함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지는 이제는 큰 관심이 없다. 집에서처럼 양말 두 짝, 가방, 잠바를 동서남북으로 생이별시키는 실력으로 학교에서도 실력발휘 했겠지. 교실 뒤에 붙은 그림은 안 봐도 뻔하다. 추상파의 아버지 칸딘스키가 부활한 것 같은 알 수 없는 대작을 탄생시키셨겠지. 한 두해 보나. 안 봐야 속 편하지.

준비한 모나리자 미소와 함께 “엄마 간다”를 던지며 유쾌한 은선씨는 쿨하게 돌아선다.(뒷모습 멋졌겠지)

    

 나는 앞으로도 이 거북이 아들에게 쿨할 예정이다.(요즘에도 쿨하다를 쓰나요. 너무 옛날 사람인가요) 쿨하지 않고서야 아들 둘 어찌 키우겠나. 생존을 위한 필수 선택이다. 다만 바라는 것은 나의 이 담담함이 아들들에게 무수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 나무가 되어주는 것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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