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쫓아 이곳에 왔을까.
도쿄로 떠나기 한 달 전 JLPT 4급 시험을 치렀다.
결과가 채 나오기 전, 이미 나의 위치는 도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데 일본에서 지낸다는 것은 어떨까.
나는 알지 못했다.
아니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도쿄에 도착한 다음날.
긴 여정에 지친 나는 하루종일 잠만 잤다.
제대로 된 이불조차 없이 추운 일본 집에서 용케 긴 잠을 청했다.
애니메이션 속에서만 보던 일본 가정집에 내 모습이 등장한다.
집안에서 내뱉는 뿌연 입김, 짱구가 그토록 나오기 싫어하던 코타츠가 내 눈앞에서 방영된다.
일본의 겨울은 생각만큼 춥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겨울은 집이 가장 추운 법이었다.
당연하게 나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몇 년 만에 지독한 감기를 앓게 되었다.
들뜬 마음이 고작 감기라는 이름에 꺾여버렸다.
집 근처 드럭스토어에서 힘겹게 구매한 감기약으로 며칠을 버텼다.
감기약을 사는 게 힘겨운 일인가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내가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제야 직면하게 되었다.
도착 첫날, 공항에서, 그리고 역에서 들리지 않던 말들이
마음만 먹으면 들릴 거라 생각했다.
마치 긴 여정으로 피곤한 탓에 내가 스스로 듣지 않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스스로에게 언어 스위치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내가 일본에 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하고, 그리고 실제로 떠나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나라는 사람은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지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저 그때의 나는 현실에서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되도록 멀고, 이왕이면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거기다 한국인이 없는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 하나만으로 나는 도쿄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스스로가 바보 같은지 글을 쓰는 지금에도 느끼고 있다.
일본에서의 첫 주, 아니 한 달은 나에게 꽤나 잔인한 시간들이었다.
스스로가 꿈이라고 칭하던 형체 없는 목표에 다가선 나는,
안일함에 발목 잡혀 느껴본 적 없는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언어’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한 체계적인 기호 체계.
언어는 인간의 의사소통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상의 전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다 이런 언어를 나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당장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갔다. 우선 워홀 3종세트부터.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온 사람들에게는 입문자로서 해야 할 3가지 일이 있다.
이를 우리 워홀러들은 3종세트 정도로 부르고 있다.
입국 후 1주일 안에 관할 주소지의 구약소 혹은 시약소를 찾아서 전입신고, 건강보험, 연금 등 서류적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전입신고를 무사히 넘겼다면 한국의 우체국 정도의 포지션인 일본 유초(ゆうちょ)를 방문해서 통장을 만든다.
이 통장개설까지 진행이 되었다면 휴대폰 개통까지 마무리 지으면 된다.
보통 이 일들은 하루에서 이틀이면 진행이 되는 업무이다. 아마 그리고 워홀러들에게는 가장 큰 숙제일 것이다.
겨우 히라가나 카타카나를 읽을 줄 알고, 얄팍한 일본 문화 지식을 알고 있으며, 고등학교 3학년 때 배운 기초 일본어정도를 말하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무거운 숙제가 되어버렸다.
창피하지만 나는 이 숙제의 존재를 일본에 오기 이틀 전에서야 알게 되었다. 얼마나 정보력이 없는 사람인가 나는.
겁쟁이라 많은 것들을 두려워하는 사람치고는 태평해 보일 수도 있겠다.
결론만 말하자면 워홀 3종세트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나의 일본어 실력은 형편없지만 그럼에도 이를 상쇄해 주는 부분들이 존재했다.
이는 대부분의 일본 직원분들은 친절하다는 것이다. 제대로 읽지도 말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후리가나(ふりがな,한자를 읽는 방법)를 하나하나 적어주시고, 영어를 잘하는 직원분을 불러와 주시도 했다.
결국은 번역기와 직원분간의 길고 긴 씨름으로 끝이 났지만 말이다.
나는 일본여행을 제법 다녔었다. 20대 초반 가성비 오사카 여행이 유행하면서 홀로 떠났었고, 이후에 후쿠오카, 오키나와, 삿포로 등 대표적인 관광도시들을 섭렵했다.
일본 여행 중에 불편한 것들은 없었다. 나는 히라가나를 읽을 줄 알고, 일본어로 주문을 할 줄 알았으며, 여행자로서 갖춰야 할 문화적 예의를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만난 일본 사람들은 나를 좋아해 줬다. 잠시나마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하던 일본인 친구들도 생겼던 시절도 있을 만큼.
나는 딱 이 마음정도를 품고서 도쿄에 도착을 했던 것이다. 이 한없이 가볍고 자만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고작 여행을 떠나는 각오정도로 도쿄라는 일상을 맞이한 나는 큰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여행과 생활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어리석음의 대가일지도 모르겠다.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요즘 세상에는 휴대폰만 있으면 의사소통에는 무리가 없을 거라는.
그런 불량식품 같은 위로를 스스로에게 건넸다.
역시나 나의 마음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많이 위축이 됐다. 편의점, 마트, 식당, 약국 어딜 가도 내가 알지 못하는 말 투성이었다.
번역기는 현지인들이 쓰는 말들을 쓰지 못했고, 내가 사는 동네 키요세는 그저 이름만 도쿄뿐인 외곽에 위치한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그런 마을에서 나와 같은 이방인은 환영받기 어려웠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분명 1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공부하지 않은 나 스스로를 다그쳤다.
자신도 분명하게 정의 내리지 못하는 허황된 꿈과 목표 하나만을 품고 떠나온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렇게 행복이라는 거창한 단어 하나를 무기로 도착한 나의 도쿄생활의 시작은,
알맹이 없이 크게 부풀린 몸짓만큼이나 큰 공허함으로 가득 찼다.
아니,
거창한 표현이 필요 없을 정도로 냉혹한 현실을 마주했었다.
그때의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