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바빴는데 정작 이번 주에 해야 할 일은 언제 시작하죠”
“중요한 일부터 하라는데 중요하다의 기준은 뭔가요”
입사 3년 차쯤 됐을 때 매일 쉬지 않고 일하는데 주간 회의 때마다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야근까지 하면서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데 팀장님이 콕 짚는 포인트마다 도통 진전이 없어서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같이 일해 볼 수 있어서 지금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는 선배 한 명이 팀에 있었다. 본인 맡은 일은 물론 결국 내가 펑크 낸 일까지 받아서 하면서도 취합 업무, 타 부서와의 협업 업무까지 해내는 걸 보면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바쁜 와중에 피드백도 빠르고 그 선배한테만 가면 일이 진척이 되는데 신기한 건 야근 한 번을 하는 법이 없었다. 칼퇴근하고 저녁마다 꽉꽉 찬 개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즐겁게 취미생활까지 해내는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
아니 저게 정말 가능한 건지. 만약에 직접 옆에서 보지 않고 글로만 봤으면 못 믿었을 것 같다. 나는 생각나는 일을 그때그때 포스트잇에 적어서 책상이나 모니터에 붙이기도 하고 이 노트에 적기도 하고 보고서 여백에 적기도 해서 필요할 때 보려면 찾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출근해서 야심 차게 계획을 세운 대로 일을 하다가도 전화 오면 그거 받고 수시로 메일 확인하고 회의에 불려 갔다가 놓친 일이 생각나서 빨리 달라는 일부터 하다 보면 퇴근 시간을 넘기는 게 일상이었다. 그날도 남아서 야근을 하려는데 일 다 끝내고 티타임까지 갖다가 칼퇴근하는 선배를 보니 비법이 뭔지 조금씩 따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선배는 본인이 맡은 업무에서 꼭 해야 할 일을 연간, 월간, 주간으로 뽑고 그걸 매일 보면서 체크했다. 쫙 펴면 2페이지에 걸쳐서 위클리 일정이 한눈에 보이는 다이어리를 썼는데, 하루 한 번이 아니라 업무와 관련된 일이나 통화하면서도 수시로 체크하고 챙겨야 할 일을 지워나가는 것을 보았다. 누구에게 의사결정받아야 하는지 누가 이 업무를 아는지를 귀신같이 찾아내서 본인이 할 부분 외에는 위임도 빠르게 결정했다. 인상 깊었던 것은 특히 내가 취약한 부분으로, 거절과 지연을 매우 능숙하게 해냈다. 사전에 어젠다와 참석자를 확인해서 꼭 필요한 회의에만 참석하고, 잠깐의 미팅이라도 자기 위주로 시간을 정해서 했다. 자료를 달라고 전화 오고 찾아오고 해도 넘길 수 있는 건 내일로 넘기고 타 팀에 이관하니 거짓말처럼 금세 해결되는 것이었다. 실무자였지만 직급보다 더 중요한 일을 많이 해내고 팀장보다 더 빠르게 결정하니 시간이 2배로 늘어나는 게 가능하다는 걸 목격했다. 실제로 그 선배는 특진에 특진을 거쳐 최연소 팀장이 되었고 여전히 잘 나가고 계신다.
나는 완벽하지 않지만, 완벽을 추구하고 빨리 처리하고 싶은 욕심이 많아서 그 선배 스타일을 똑같이 따라 할 자신도 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성격이 급해서 행동파인 데다가, 작은 거라도 실천에 옮기려고 한다는 점에서 희망을 품었다. 출근해서 아침마다 뭐가 우선순위인지 정하는 것부터 연습해야 했다. 어려운 일은 시작하는 거 자체를 힘들어하는 스타일이고 여러 번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다 보니 고민할 시간도 수정할 시간도 많이 걸리는 편이었다. 그래서 다음 5가지를 실천하는데 서 시작했다.
첫째, 다음 주 주간 회의에 팀장님이 확인하실 내용부터 일 단위로 나눠서 무조건 오전에 2시간 이상씩은 강제로 할당해서 처리해봤다. 둘째, 월별로 주별로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기한보다 하루 먼저 끝내려고 했다. 셋째,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70%만 되면 보고 후 피드백을 요청하고 한 번 더 수정했다. 넷째, 회의를 골라서 참석할 위치는 안 되니 회의록이라도 빨리 썼다. 다섯째, 메일은 오전 10시에 한번 오후 2시에 한번 몰아서 회신했다.
혼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힘들어서 팀장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실제로 중요한) 업무 위주로 시작했고, 루틴 하게 해야 하는 업무를 조금 분배해서 조금 여유롭게 처리하려고 했다. 그리고 중요하지는 않아도 자잘하게 처리해야 하는 업무는 수시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한 타임 쉬거나 집중도가 떨어질 때 했다. 롤모델인 그 선배가 쓰던 위클리 형 다이어리를 선물 받아서, 일주일 치 업무 일정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체크하는 습관을 들였다. 물론 드라마틱하게 업무 성과가 개선되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효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업무를 사소하게 놓치는 게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우선순위를 판단하고 주간별로 스스로 계획대로 처리하는 게 조금씩 가능해졌다. 그렇게 3~4년 정도 지나자, 일이 진척되기 시작한다는 걸 스스로도 체감할 수 있었다.
그즈음 해서 결혼을 준비하고 신혼을 즐기고 임신에 출산까지 정말 순식간에 해치웠다. 진짜 일 못 하는구나 싶었을 때는 자존감부터 바닥이었고 평일에 데이트할 체력과 시간도 없었거니와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일이 컨트롤이 되기 시작하고 시간과 일정을 관리할 수 있게 되자 칼퇴근하는 날이 많아졌고 이제는 마지막으로 야근을 한 기억이 잘 안 날 정도이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사원 시절에 일이 걱정이 돼서 여름휴가를 이틀씩 나누어서 갔는데, 2주일 정도 휴가를 내고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워킹맘으로서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업무시간 내에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정말 큰 자산이다. 7시 반에 출근하고 4시 반에 칼 퇴근해서 내 손으로 아이 목욕을 시키고 저녁을 차려주고 잠도 재울 수 있다는 게 가장 감사한 점이다. 연례행사로 올해도 10월이 되자마자 기쁜 마음으로 내년 위클리 형 다이어리를 내 거랑 선배 들 거까지 샀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가치 있게 활용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기회와 기쁨이 있다는 것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