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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라소니 Oct 26. 2020

공황장애 약 끊고도 4년째 잘살고 있습니다.

#인간관계-1

“화병 인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잘 안 쉬어져요”

“인간관계에 치이면서 자존감이 한없이 낮아져요”


  연예인들에게 나타난다는 공황장애 증상이 6년 전, 30대 초반이던 나한테도 찾아왔다. 객관적으로 회사에서는 사원이 아닌 ‘대리님’으로 승진했고 전공을 살려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20대 내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집도 차도 없고,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한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졌었다.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사소한 일로 회사에서 혼이 났던 날에도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헬스장에서 러닝 머신을 열심히 뛰고 있었다. TV 예능 프로에서 GOD의 ‘길’이라는 노래를 들었는데 평상시에는 들리지도 않던 가사가 귀에 박히면서 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눈에서 물이 펑펑 쏟아졌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가사가 뼈를 때리다 못해 골절상 당한 느낌이었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계속 이 일을 해도 되는 건지, 나만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막상 중고등학교 때는 별로 진지하게 미래나 꿈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았다. 수능 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가고 전공을 선택하면서 뒤늦은 사춘기가 와서 이것저것 해보다가 마케팅이 좋아서 파기 시작했었다. 막 열풍이 불던 대외활동과 관련 스펙도 열심히 쌓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전공도 한 덕분에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하는 일은 자료 찾고 엑셀 파일 정리하고 이리저리 혼나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하나도 없고 한없이 초라하고. 그래서 자존감이 바닥을 쳤던 시기였다.

  

“프로젝트 하나하나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마라. 충분히 잘하고 있다”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좋으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런 따뜻한 조언도 들었지만, 막상 그때는 공감도 안 되고 실천도 불가능했다. 자기 전에 오늘 회의할 때 못다 한 말들, 별 뜻 없이 한 말도 다 일일이 곱씹으면서 복기하는 날들이 많아지다 보니 불면증도 따라왔다. 안 좋은 일들은 떼로 온다더니 회사에서 터진 문제에 얽혀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집안에도 힘든 일이 생겨서 정말 베개가 푹 졌도록 운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걸 매일매일 체험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정말 눈이 퉁퉁 부어서 개구리 같은 행색 때문에 숟가락 두 개를 냉동실에서 꺼내서 부기를 빼고 출근하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회사에서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서 업무시간에도 한참을 밖에서 걷다가 들어간 적도 많았다. 회사 화장실에서 너무 엉엉 울어서 자리로 돌아갈 용기가 안 나서 한참을 있다가 들어간 적도 있었다. 이대로는 너무 힘들겠다 싶어서 당시 팀장님께 휴직하고 싶다고 용기 내서 말씀드렸었다.


“괜찮아! 휴직은 무슨 휴직이야. 일단 회사 다녀야지”


  그냥 휴직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으면 다시 밖으로 나오기는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각자 슬럼프와 우울증을 극복하는 방법이 다를 것이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행히도 나는 주위의 도움으로 나한테 맞는 방법을 빨리 찾을 수 있었다. 감명 깊은 책이라면서 여기저기 줄이 쳐져 있는 책 선물을 받기도 했고, 그냥 새벽까지 술만 먹어주는 선배랑 친구들도 있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정신과 진료나 상담을 받아 보는 것을 권해준 친구도 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위로를 해준 덕분에 나는 매일의 일상을 살아낼 힘을 다시 얻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체도 없는 그 힘듦 때문에 너무 아픈 시간을 보냈지만 주위에서 내미는 손을 잡을 용기는 남아 있었다. 종교를 믿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어서 번갈아 가면서 안아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대로 가라앉기에 내가 너무 안타깝고, 내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맘 속 깊이 생겨났다. 밥도 간식도 먹고 잠도 제때 자는 날이 늘어나고 편하게 웃을 수 있는 날들도 점점 많아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문제들과는 별개로 앞으로의 내 삶은 또 그대로 잘 이어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가질 수 있었다.


  사실 너무 힘들었을 때는 힘내라는 말도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앉을 수 있는 힘이 생기자, 내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설 수 있는 건 결국 내 두 다리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어느 날은 꿈에서 너무 깊은 물속에서 수영을 하는데 빛이 거의 들어오지를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위쪽으로 헤엄을 쳐서 움직였더니 조금씩 빛이 보이고 끝내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면서 깼다. 꿈에서 깨고서도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춥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한참을 달달 떨었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내 무의식이 반영됐던 게 아닌가 싶다. 바뀌고 싶었고 이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각자의 이유로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내 경험을 들려주고 싶다. 글쎄 뭔가 대단한 비법이랄 건 없다. 좋다고 하는 걸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우선 내 발로 정신과를 찾아가서 진단을 했더니 우울증이 심각하다고 했었다. 2년간 처방을 받고 부작용이 있으면 약도 바꿔가면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햇볕도 쬐고 박사과정에 진학도 하고 정말 바쁘게 지내면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당장 눈앞에 닥친 회사 일과 학교 과제를 하느라 고민하고 우울해할 시간이 없었다. 꼬인 인간관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나 과거를 붙들고 있기보다는 내 앞에 놓인 하루, 오늘과 새로운 내일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뾰족하고 걱정이 가득한 나였지만 생활력 강하고 진취적인 신여성으로 대해줄 때마다 힐링이 됐다. 야근하고 와서 학교 과제까지 하느라 꼬박 밤을 새운 주말 아침이면 짜증이 극에 달해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을 하냐며 신세 한탄을 해댔다. 아메리카노 말고 휘핑크림 듬뿍 얹은 커피 한 잔 먹인 후에 차를 태우면 나는 멀미가 심해서 4~5시간을 꼬박 입 벌리고 잠만 잤다. 그러다가 눈을 뜨면 강원도나 남해 바닷가였다. 뻥 뚫린 풍경을 보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났다. 덕분에 결혼을 한 후로는 약 없이도 잠을 푹 잘 수 있었고 어둠의 긴 터널 밖을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다시 내가 44 사이즈 원피스를 이쁘게 입어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슬프기도 하지만, 둥글둥글하고 뚝심 있는 아줌마가 된 나도 좋다. 지금은 덜 예민하고 덜 신경 쓰는 데다가, 애 키우고 회사 다니느라 힘들어서 어디든 머리만 닿으면 쪽잠 자기 바쁘다. 혹시 오늘 너무 힘들었다면 달달한 커피랑 젤리를 안 챙겨 먹은 건 아닌지, 소고기를 마지막으로 구워 먹은 날이 언제 인지부터 체크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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