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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om P Jun 15. 2024

밥 한 술 넘기기도 힘들 정도

죄책감이 곧 벌입니다.

주차를 잘못하는 바람에 사람이 죽었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밥 한 술 넘기기도 힘듭니다.


 법륜스님의 강연에서 한 아주머니께서 이런 질문을 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법륜스님은 '어떻게 지내더라도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으며, 죽은 사람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영상을 보고 죄책감이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대안은 법륜스님의 것과 조금 다릅니다. 제 생각에, 그녀는 죄책감을 있는 그대로 한껏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죗값'인 것입니다. 밥 한 술 넘기기도 힘들 정도의 고통이 바로 죗값인 것입니다. 죗값을 다 치르고 나면, 자연스럽게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망자의 용서입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용서입니다.


 죄책감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 모든 말들의 결론은 결국 '시간으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감옥에 갈까 두려워 손을 거두어들였습니다. 그 도둑은 죗값을 치른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한 도둑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도둑은 형량을 모두 살고 사회로 돌아왔습니다. 도둑이 할 줄 아는 것은 도둑질뿐이었습니다. 다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려는 찰나, 감옥에 갈까 두려워 손을 거두어들였습니다. 그 도둑은 죗값을 치른 것이 아닙니다. 죗값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죗값은, 그 도둑이 죄책감에 맨몸으로 부딪힐 때 비로소 치를 수 있는 것입니다. 형량을 사는 것은 그저 사회구조적 응징을 받는 것이며, 죗값과는 무관합니다. 예를 들어, 한 억울한 이가 도둑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형량을 모두 살고 사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죗값을 치른 것일까요. 아니, 그는 그저 형량을 채우고 사회로 복귀한 전과자일 뿐입니다. 그는 지은 죄가 없으므로 죗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사회의 아이러니한 점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죄의 대가와 진짜 '죗값'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사회는 무고한 시민도 감옥에 잡아넣곤 하며, 죄인을 사회에 방생하기도 합니다. 진짜 죗값은 오직 개인 스스로가 치를 수 있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사회는 죄와 무관한 부족적 규율에 따라 개인을 처벌하거나 처벌하지 않습니다. 불완전한 사회는 죗값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사회의 존속가능성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 사회로부터 죗값을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예수님께 모두 용서받았습니다.

 영화 '밀양'에서 범죄자가 피해자에게 한 말입니다. 피해자는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요. 피해자에게는 용서할 권리조차 박탈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죗값은 오로지 가해자의 몫입니다. 피해자는 용서할지 복수할지와 같은 자신의 결심에만 권한이 주어집니다. 통탄스럽지만 이것이 세상입니다.

가해자에게도 충분히 그런 행동을 할만한 서사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매우 불쾌한 진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쾌함은 흩어질 것입니다. 삶은 수많은 인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가해자에게도 충분히 그런 행동을 할만한 서사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피해자에게는 가해 당할만한 서사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 아내가 남편을 칼로 찔러 살해했다면, 그 아내는 무조건적으로 질타받아 마땅한지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그들의 서사를 알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타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아내를 응징합니다. 그 서사를 조금 참작하겠으며, 판결 당시의 사회적 합의(민중 다수의 견해)를 고려하겠지만, 여하튼 사회는 아내를 응징합니다.


 하지만 아내는 죄를 짓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형량보다 큰 죄를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크기는 아내의 죄책감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죗값을 치르는 장소가 감옥인지 안락한 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밥 한 술 넘기기 힘들 정도로 죄책감에 시달린다면, 그녀는 그만큼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녀가 잘 먹고 씩씩하게 교도소 생활을 치른다면 그녀는 그만큼만 죄를 지은 것입니다. 또는 죄를 아예 짓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패스'의 죗값은 누가 치를까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한창 '패스'에 대한 이야기가 사회적 화두였던 적이 있습니다. 요즘 MBTI의 T에 대한 조롱 섞인 농담들도 비슷한 맥락이겠지요. MBTI의 경우 T와 F의 특성이 사회적으로 잘못 이해된 면이 있어 이 부분은 차치하겠으나, 분명 세상에는 사이코패스도 있고 소시오패스도 있겠지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이는 평생 죗값을 치르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또는 후천적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이는 평생 죗값을 치르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감옥이라는 환경에서도 가장 그들답게 적응해 나갈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사회적으로 응징할 수는 있겠으나, 그들은 평생 '죗값'을 받는다는 의식을 가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단지 '패배감'만 느낄 수 있겠지요. 패배감은 죄책감보다 가벼운 감정입니다. 자신의 나약함만을 받아들이면 소멸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불합리함이 존재합니다. 같은 잘못된 행위를 하더라도, 죗값은 모두가 다르게 받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 그 내면의 죄책감을 들여다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이 의식의 표면에 떠올라있건 무의식 속에 잠겨있건, 분명 예상치 못한 순간에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죗값을 치를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물론 사회적 응징과 별개로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식음을 전폐할 수도 있고, 삼보일배를 할 수도 있으며, 알코올 중독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죗값을 모두 다 치르고 나서, 우리는 다시 활력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죗값을 다 치른 순간입니다.


 타인의 죄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자신의 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타인에게 죗값을 물 수 있는 권력은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사회적 응징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굴복시킬 뿐입니다. 그것은 무고한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죗값이 아닙니다. 죗값은 죄를 지은 이의 내부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고통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책감이 가지는, 죗값을 물을 수 있는 진짜 권력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사회적 응징과 죗값을 묻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같은 죄에 대하여 모두 다른 죗값을 치르게 됩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타인의 죄에 대한 죗값을 물을 수 있는 권력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죗값에만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잘못으로 말미암은 큰 죄책감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의 죗값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겪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건강한 태도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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