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그러나 희망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다시 찾아왔다. 오웰은 1937년 5월에 휴가차 바르셀로나에 갔다가 거기서 벌어진 시가전에 긴급하게 투입되었다. 때문에 휴가를 반납해야 했던 건 물론이고, 또다시 소모적인 전쟁에 헛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시가전은 공화파 경찰과 무정부주의 노동자 연합 간의 싸움이었다. 오웰이 속해 있었던 통일 노동자당은 무정부주의 연합과 함께 싸웠는데, 정당의 근거지로 사용되었던 호텔 옆에는 경찰이 주둔하는 카페가 있었다. 마치 전선에서의 지루한 악몽을 되풀이하듯이 양쪽은 바로 옆 건물, 혹은 맞은편 건물에 서로의 적을 두고도 총알을 소진하지 않았다.
나 또한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부분의 집필을 시작했을 때 코로나 재확진 판정을 받았다. 전염병이 창궐한 지 3년이 지나 이제는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더 어색해 보이는 시점에 재확진은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왕성한 에너지로 글을 써오다가 갑자기 막히는 기분은 몹시 불쾌했다. 신체적인 피로와 무력감, 고립감이 다시 정신을 흔들었다. 일주일 안에 글을 완성하겠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면서 급기야 나의 능력까지 시험대 위에 올랐다. 미치게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끓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 상태가 원망스러웠고, 휴식조차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며 역행하기 시작한 가치들이 역겨웠다. 새로운 시대의 희망과 가능성은 사라지고, 나는 다시 전염병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전쟁도 이제는 옛말이 아니다. 오웰이 참전했던 스페인 내전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6.25 전쟁 등은 더 이상 과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년이 지났고, 확실히 전과는 다른 긴장감이 감돈다. 전 세계가 우경화되어 빗장을 걸어 잠그는 와중에 기회주의자들은 위태로운 사회를 흔들며 탐욕스럽게 제 몫만을 챙겨 달아난다. 그래서 위기는 메스껍다. 온갖 추악한 면모들이 폭로되거나 자랑처럼 떠벌려져 구토를 유발한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변함없이 착취되면서 또 너무나도 쉽게 선동된다. 큰 불안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더욱 격렬하게 새로운 불안을 차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전쟁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점차 타락해 간다.
이 문장을 보면 오웰도 위기가 주는 메스꺼움을 느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우리가 공통적으로 느낀 그 불쾌함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느낀 메스꺼움은 단순히 코로나 약이 풍기는 역한 맛 때문일 수도 있고, 소화가 잘 안 돼서 정말로 속이 메스꺼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마냥 절망으로 인식해 좌절할 필요는 없다. 난 위기에 대응하는 능력을 통해 진가가 발휘된다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작가는 전쟁이나 재난이 불러오는 타락을 역전시키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런 의미에서 오웰은 적절한 예시다.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전쟁의 더러움과 사람의 힘을 깨닫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지 않았는가?
상황이 나의 가치관을 바꿨다. 시대가 내 삶에 직접 침투하는 경험을 한 뒤부터 사회 속 사건들은 이제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난 세상과 동떨어져 무엇과도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 안에 속해 이런저런 영향을 주고받고 제도와 경제와 정치에 의해 얼마든지 입지가 흔들릴 수 있으며, 문제의식을 품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민이자 개인이다. 내게는 기성세대의 유산에 기생하지 않은 채 내가 맞을 미래를 직접 설계하고 꾸려나가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나 혼자서는 해낼 수 없다(만약 내 뜻대로만 세상이 돌아간다면 나는 그 세상의 독재자일 것이다). 세상을 상대로 개인이 승리하기는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대신 그 난관을 뚫기 위해 투쟁과 증명과 고백과 선언으로 몸집을 키우고 목소리를 키울 수 있다. 언어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펜은 그런 언어의 지지를 받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지닌다.
난 항상 조직적인 관습과 시스템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입시와 서열, 교육과 위계, 예술과 답습, 신체와 차별 등에 신물을 느꼈다. 그래서 그런 것들로부터 도망치니 일시적으로 마음이 편해졌던 것이다. 쓸모없고 낡아빠진 가치들이 활개 치는 현장에 몸담지 않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느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마냥 피할 수는 없다. 난 비참한 실태를 고발하는 데 지독한 관심을 두고 있고, 그걸 떠나서는 별다른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일껏 다 던질 각오로 훌쩍 떠난 뒤에 한다는 일이 다시 원래의 문제로 돌아오는 거라니, 무언가를 변화시키고 싶은 사람은 결국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가 보다.
서서히 글을 마무리하며 깨달은 사실은 위기보다 진실이 더 메스껍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밌게도 진실이 메스꺼울수록 내가 느끼는 희열은 배가 된다. 내면에서 역겨움이 커질 때마다 더 큰 반항심이 피어나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망설임 없이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선물 같다. 이에 관해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불쾌한 장면을 보고도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잔인함과 역겨움을 똑바로 응시하는 성향”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어릴 때 우리 집 거실에서 건장한 남자 둘이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다가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가슴과 배의 살가죽을 뜯어버리는 악몽을 꾼 적이 있다. 어디서 그 이미지들을 끌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과 요동치는 장기들이 훤히 드러난 장면을 본 후로 난 잔인하고 피가 낭자한 장면을 아무런 감정 없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분명히 충격이 컸을 텐데, 지금은 그때의 충격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손택이 “조금도 움찔하지 않은 채 이런 이미지를 쳐다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낀다며 “움찔거린다는 것 자체도 일종의 쾌락이”라고 말했던 것이 정확히 나를 가리키고 있다.
끔찍함 속에 매력적인 아름다움이 놓여 있다.
황폐함 속에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그리고 위의 문장처럼 그녀가 말한 쾌락이 끔찍한 현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생기는 감정이고 “불쾌할 뿐만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리얼리즘”이라면, 난 그 사조를 적극적으로 추앙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 난 나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에게도 가학적인 경향이 있지만, 그래야 진실을 파헤쳐 알리는 작업에 무게가 더해지고 의미가 생긴다. 그만큼 난 내 글에 진실과 진심이 투영되길 바란다. 난 어느 때보다 절실히 모든 시대가 전쟁과 철학의 시대라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특히 지금이 진실과 진심이 가장 뼈저리게 필요한 때라고 머리가 아닌 피부로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