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관한 이야기
내 글의 안식처는 어디일까? 아직은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준비를 다 마쳐놓고 출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 역량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난 글의 고향을 찾아주면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막연히 믿는다. 굉장히 섣부른 판단일지 몰라도, 우선 인생의 가장 강렬한 기억을 따라가기로 했다. 가지고 있는 수많은 기억 중 대부분의 기억은 오직 한 장소로 수렴한다. 그곳은 내가 늘 돌아가고 싶었던 곳이다.
영어도 금방 배웠다. 이것은 땅에 관한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자면 넓은 대륙에 관한 이야기다. 2004년, 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당시 한국 나이로 7살이었던 나의 눈에 처음 타본 비행기와 처음 밟아본 외국 땅은 환상 그 자체였다. 벌써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해맑은 어린아이는 겁이 없었고, 영어도 금방 배웠다. 사람들은 다 내게 친절했고, 모든 것이 즐거웠다. 그때 우리 가족이 1년간 머물렀던 집은 아파트 단지 안에 있었고, 총 두 세대가 거주할 수 있는 2층짜리 목조 주택의 아래층이었다. 단지는 매우 넓어 주차장과 수영장, 공용세탁실, 헬스장까지 모든 시설이 지상 위에 쭉 늘어져 있었다. 집 앞 주차장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있으면 위층에 살았던 흑인 아주머니가 스케이트 실력을 칭찬해 주었고, 공용세탁실에서 빨래를 돌리는 동안 헬스장에서 기구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포니테일을 질끈 묶은 백인 아주머니가 트레드밀 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 두 아주머니와는 자주 마주쳤다.
야외 공간을 뒤로한 채 우리 가족의 포근한 보금자리의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바닥에 깔린 카펫이 발에 밟힌다. 까슬까슬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거실로 들어서면 중고로 얻어온 꽃무늬 패턴의 낡은 소파와 미식축구 경기가 나오는 아주 작은 볼록 TV가 있고, 소파 뒤에는 식탁으로 쓰이는 접이식 테이블 하나와 접이식 의자 다섯 개가 있다. 그 위로는 따뜻한 햇살을 한가득 비추는 창문이 있는데, 세 면이 바깥쪽으로 볼록 튀어나가 있어 그로 인해 생긴 창가의 작은 공간에는 핼러윈 때 늙은 호박 조각대회에서 상품으로 받은 사이키 조명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면 부엌 조리대가 보인다. 그 너머 오븐 안에는 고추장 소스를 올린 퓨전식 돼지고기 스테이크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고 있다. 우리 가족 중 누구도 그 맛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기억하기로 난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유치원에 갔다. 유치원에 가면 서로 다른 인종의 여자아이들 세 명이 함께 어울렸다. 동양인과 백인, 히스패닉 아이들 사이에는 피부색도 생김새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셋은 그저 노느라 바빴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미스 애플이라고 불렸던 선생님은 출석을 부를 때 내 이름을 잘못 발음해 ‘이운’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은 그때부터 나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학교를 떠날 때가 되었을 무렵에 선생님은 내게 작은 카드를 써주었다. 지금은 잃어버려서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카드는 언제라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선생님을 만날 거라는 강한 의지를 일으켰다. 그만큼 엄청난 관대함과 포용력을 느꼈다. 나도 그곳에 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내 정신을 지배했다.
아주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댈러스를 떠난 우리 가족은 한국에 돌아오기 전 3주간 드넓은 미 대륙의 남쪽과 서쪽을 오직 자동차만으로 횡단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우리는 어두운 붉은색 기아 승합차를 타고 끝없는 사막의 직선 도로를 밤낮으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작은 오빠는 미국 지도를 펼치고 운전 중인 아빠에게 경로를 안내했다. 그러던 어느 캄캄한 밤에 여전히 사막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을 때, 멀리서만 내리치던 벼락이 갑자기 차 바로 옆까지 번쩍 내리쳤다. 빛은 조명탄처럼 너무 환해서 낮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때의 화이트아웃 외에 나머지 기억들은 대부분 파편과 같다. 뉴올리언스의 어느 밤에는 초록색 조명에서 쏟아지는 빛과 사람들로 가득 찬 비좁은 공간에서 영혼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난 그 영향으로 여전히 재즈를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미시시피강에 뜬 배 위에서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강풍을 맞았고, 샌프란시스코의 언덕 위에서는 안개가 잔뜩 낀 금문교를 내려다봤다. 대도시가 거대한 물을 품은 건지 아니면 거센 물살이 도심을 뚫고 지나가는 건지 잘 분간이 되지 않지만, 그 둘의 조화는 언제나 내게 익숙한 만족감을 준다.
그랜드캐니언에서는 한눈에 다 담을 수 없는 거대한 협곡을, 요세미티에서는 고개를 다 젖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큰 나무들을, 옐로스톤에서는 지구 내부의 힘을 과시하듯 뜨겁게 펄펄 끓는 유황을 직접 마주했다. 광활한 대륙과 그만큼 규모가 큰 자연 속을 누비며 난 탐험가가 된 기분을 만끽했다(한국으로 돌아와 성장한 뒤에도 지리와 지질, 땅의 형성과 땅을 이루는 것들에 관심을 가졌던 건 그때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강렬한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작은 반도, 그마저도 반으로 잘린 땅은 더욱 갑갑하게 느껴졌다. 전에는 차고 넘쳤던 환상과 다양성이 사라졌다. 북태평양을 제집처럼 헤엄치던 돌고래가 어느 날 갑자기 도심 속 아쿠아리움 안에 갇힌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전처럼 활개 칠 수 없을 거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문득 조앤 디디온이 자신의 글과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말했던 문장이 떠올랐다.
자란 곳의 지형이 사람을 만드는 것 같지 않아요? 지형이 제 생각, 행동, 자아를 형성했어요.
난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 내 말과 생각과 행동은 전부 땅의 크기에 걸맞게 큼직해졌다. 어린 시절의 역동적인 기억은 나를 드넓은 대지 위를 걸어 다니는 자유로운 탐험가로 만들었다. 건조한 사막과 울창한 숲, 거센 바람이 부는 강이 이미 내 안에 스며들었다. 그런데 그 본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이 많이 흐려져서 이제는 그런 엄청난 일을 스스로 해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이 좁은 땅 안에 갇혀 그대로 말라가는 것 같았다. 미국을 떠나온 후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련이 남아 있을 만큼 난 끊임없이 기억 속 환상의 나라에 도착하는 꿈을 꾸고 있다. 마치 그곳에 가기만 하면 모든 답답함과 상실감이 전부 해소될 것처럼.
하지만 내가 몰랐던 사실이 있다. 그때 난 많은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어렸다. 너무 순진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인종 차별은 내 가족에게도 수없이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고, 가끔은 정말 목숨이 위협을 받았다. 난 이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듣고 곧바로 환상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경험한 세계는 실제 세계의 극히 일부분, 특히 미화된 부분이었고, 해맑은 한 어린아이가 인종에 상관없이 받을 수 있는 특혜일 뿐이었다. 또 다른 인종이 주류인 사회에서는 더 큰 세계를 꿈꾸기보다 피부색이 만든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만이 목적인 늪에 빠질 수 있다. 비주류의 인종과 국적과 성별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조건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건 기존 질서가 한 개인을 그의 정체성 안에만 가둬버리는 것과 같다. 표현의 자유를 제공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울타리를 쳐놓고 거기서만 뛰어놀라고 압박하는 꼴이다.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상황에도 난 여전히 글의 고향을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리고 조앤 디디온은 다시 말한다.
장소에 대한 진실은 손에 잡히지 않고, 신중하게 추적해야 한다.
다행히 내 기억 속에 어떤 장소 하나가 더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