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속이고 죽음으로 모는 것들

by 이운

작가를 만드는 조건을 깨닫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중에는 날 착각하게 만든 속임수도 있었다. 교묘한 논리에 난 쉽게 넘어갔었다. 사실 진정한 조건을 깨닫는 일보다 그 속임수를 벗겨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 무엇이 거짓인지를 먼저 알아야 진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난 아주 간단한 소재만 있으면 글이 저절로 발전하기를 바랐다. 그 우둔함이 나태한 정신 상태를 만들었다. 내게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고, 그것을 언제든지 글로 펼칠 수 있는 능력도 있으니 알맞은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런 애정과 노력을 쏟지 않고도 그런 일이 가능할까? 스테파니의 딸은 어느새 오로지 제힘으로 미줄라 산 정상에 올라갔다 내려올 만큼 성장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스테파니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그녀의 글이 증명한다. 그러니 나는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조앤도 딸을 입양하던 날을 회상하면서 자신이 이 아기를 사랑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빠졌다. 모두가 아기를 가질 때 축복의 측면만을 강조하는 한편, 아무도 만약의 실패는 말하지 않는다. 조앤은 그 실패의 가능성을 염려했다. 그리고 아이가 아이여야 할 나이에 성인의 책임을 감당하기를 바랐던 자신을 꾸짖었다. 난 스테파니와 조앤을 보며 책임감이 중요함을 알았다. 얼마나 막중한 개념인지도 알았다. 그건 내가 내 글을 대할 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


두 번째 속임수는 완벽함을 향한 동경이다. 완벽함은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다. 일을 더디게 만드는 장애물일 뿐이다. 나는 이상 안에 갇혀 많은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아마추어가 가장 뼈저리게 느끼고 머릿속에 깊이 새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글은 절대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은 성공만을 바라는 그릇된 욕망이다. 글을 쓰는 일은 무엇도 보장할 수 없고, 거기에 확실한 방법론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길 위에 올라 어느 지점에서 기회를 잡고 마침내 어떤 목적지에 도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공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난 모험가는 보물을 발견해 떼돈을 벌지, 아니면 허탕을 치고 빈손으로 돌아올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냥 직관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이 길이 맞다고 확신하며 계속 걸어가고 땅을 파는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내가 나열한 작가를 만드는 조건이나 작가의 동력 같은 것들도 성공의 공식이 아니다. 나조차도 아직 자신을 진정한 작가라고 소개하지 못할 만큼 불분명한 상태인데 어떻게 그 결과가 성공일지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결론은 글을 쓰는 일을 하려면 성공은 고려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작가에 관한 진실과 거짓을 모두 발견했다 해도 여전히 작가를 죽음으로 모는 요인들이 있다. 때로는 자기 힘으로도 제어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이 한 사람을 압박한다. 그리고 압박이 거세지면 작가의 생명이 다할 수 있다. 글쓰기를 멈추지 않으려면 이런 변수에도 대비해야 한다. 이는 작가의 조건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사안이다. 어쨌든 글을 쓰는 일도 다양한 측면에서 생존과 연관되어 있으니, 살기 위해 죽지 않는 방법을 알아야겠다.


조앤은 신체가 위협받아 정신이 죽어버리는 비극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다음은 조앤이 그 두려움을 그대로 밝힌 구절이다.


손상이 육체적인 범주를 넘어선다면 어쩌지? 문제가 인지적인 것이라면 어쩌지? 내가 한때 환영했던 문체의 부재가, 내가 조장했으며 북돋우기까지 한 직선적 경향이, 이 문체의 부재가 제 나름의 사악한 일생을 막 시작한 것이라면 어쩌지? 적정한 어휘, 적절한 사고, 어휘들이 말이 되게끔 해주는 맥락, 리듬, 음악 그 자체를 불러내지 못하는 이 새로운 무능력이 체계적인 것이라면 어쩌지? 내가 말이 되는 어휘들을 다시는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쩌지?


그녀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건 오히려 죽지 않는 것, 즉 뇌와 심장, 신장, 신경계통이 손상되고도 목숨을 부지하는 삶이다. 의식이 몸 안에 갇혀 마비되는 현상은 누구에게나 두렵다. 특히 생각하고 글을 쓰는 작가에게는 그 상황이 매우 두렵다. 작가란 머리와 손에만 온 의식이 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머리로 생각하고 손으로 글을 쓰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여러분에게 직선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주제를 사실대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무엇인가가 나를 붙잡는다. 이것도 또 다른 종류의 신경 장애, 새로운 연약함일까? 나는 더 이상 직선적으로 이야기할 능력이 없는 것일까? 그 능력이 있었던 적이 있기나 할까? 그걸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 주제는 내가 다루고 싶지 않은 사안일까?


그녀는 연약함에 대해 재차 말하고 있다. 몸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신의 연약함에 관한 이야기다. 난 이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한 인물을 떠올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두 번의 비행기 사고로 온몸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거의 죽을 뻔했다. 그로 인해 병상에 누워만 있었던 그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은 급격히 쇠퇴했다. 이후 고질병과도 같았던 정신 질환을 치료하고자 받았던 전기 충격 요법은 단기 기억력을 앗아갔고, 그는 자신이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1961년 7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국 취약한 상태가 된 작가의 운명은 이런 것일까? 거기에 저항할 방법은 없을까?


해결책은 모르지만, 난 그 문제의 원인이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이라고 봤다. 헤밍웨이는 고통을 끊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 스테파니도 가난이라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녀는 20번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고, 얼른 일을 마치고 잠을 자고 싶었다. 그때 딸은 창문을 열어 자신이 아끼는 인형에게 바람을 쐬어주고 있었는데, 손을 너무 멀리 뻗는 바람에 그만 인형을 놓치고 말았다. 스테파니는 크게 소리치며 우는 딸을 달래기 위해 급한 대로 차를 갓길에 대고 떨어진 인형을 찾아 헤맸다. 그 순간 펑하며 자동차끼리 크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차 뒷좌석에는 딸이 타 있었다. 거의 정신이 나갈 것 같았던 스테파니는 황급히 차로 달려가서 딸을 확인했다. 딸은 운 좋게 부상을 면했으나, 스테파니가 일을 하고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하루를 마치면 집으로 갈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생계 수단이자 교통수단이었던 차는 산산이 부서졌다.


이 사고는 그녀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절망적인 계시와 같았다. 위기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녀는 또한 운전대를 잡을 때와 사고 지점을 지나갈 때, 심지어 일할 때도 찾아오는 후유증에 한동안 시달렸다. 난 그녀의 고통을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삶을 지탱해 주는 기둥이 무너져 지붕까지 내려앉은 잔해 속에서 간신히 숨을 쉬는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도 그녀에게는 ‘조용한 희망’이 있었고, 그것을 가지고 고통을 헤쳐나갔다. 한 번 더, 작가의 꿈이 그녀를 이끈 것이다.


해소되지 않는 감정도 일종의 고통이다. 조앤의 머릿속에서는 딸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딸의 결혼식 장면과 무릎을 꿇었을 때 보였던 신발 밑창의 모습을 반복재생했다. 그러다 서재 책상 위에서 딸이 자주 읽었던 <잠수종과 나비>를 발견했다. 그 책은 뇌혈관 발작을 일으키고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의식을 회복하지만, 말을 할 수도 없고 오직 한쪽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게 된 실화를 기록한 책이다. 조앤의 딸은 수술을 받고 입원을 하고 있었던 때에 자신의 달라진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딸은 대신 “달라진 상황에 골몰하지 않으면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원래와 같이 복원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죽었을 때처럼, 골몰하지 말자는 거야.”라고 말했다. 조앤은 상황을 극복하는 자신의 힘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그녀는 딸의 말을 따라 해소되지 않는 감정, 죽은 딸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지 않기 위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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